◆아시아교회의 토착화문제
아시아에서 선교활동의 양상은 달랐다. 유럽인들의 중국이나 인도, 일본 등을 아메리카나 아프리카처럼 군사적으로 완전히 정복할 수 없었던 이유도 있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지역의 유구한 역사와 깊은 문화적, 종교적인 기반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먼저 인도에서의 그리스도교와 현지 관습과의 적응논쟁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보자. 포르투갈인들이 인도에 도착했을 때 이미「토마스 성인의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즉 토마스 사도가 직접 인도에 건너와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여 사도시대부터 그리스도교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토마스사도가 인도에 건너와서 직접 복음을 전했다는 사실이 1∼2세기의 어느 기록에서도 입증되지 않았고, 다만「토마스 성인의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주장되고 있다. 4세기부터 그리스도교가 인도에 전파되었다는 기록은 확실하다. 지금의 이라크에 해당하는 메소포타미아나 칼데아 지방에서 온 한 사제에 의해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시리아-칼데아 전례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를 말라바르(Ma-labar) 전례라고도 한다.
1498년 포르투갈인들이 이 지역에 도착한 시초의 잠시 동안에는 서로의 관계가 좋았지만 인도의「토마스 성인 신자들」이 계속 자기네의 말라바르 전례와 전통, 동방교회처럼 사제의 결혼 등 그들 고유의 규범을 고수하면서 포르투갈 선교사들과 갈등을 가지게 되었다. 또 많은 칼데아 그리스도교인들이 네스토리오 이단을 따른 역사적인 사실이 인도의 이 그리스도교인들에게도 영향을 끼친 바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문제이므로 선교의 토착화 문제에서는 다루지 않기로 하겠다.
포르투갈의 요한 3세 왕의 요청으로 예수회가 인도의 선교에 참여하게 되어 이냐시오의 첫 동료인 프란치스코 사베리오(1506∼1552)가 1542년 5월 선교사로서 또 교황 사절로서 파견되었다. 그는 인도 원주민들의 전통적인 관습을 존중하면서 식민주의적인 선교 방식이 아니라 순수 종교적인 자세로 활동하였다. 특히 그는 항구적인 선교활동을 위해서는 현지 원주민 성직자 양성이 절대로 필요함을 깨닫고 원주민 전교사와 성직자 양성에 온 힘을 기울였다. 얼마 후에 일본에 대한 소식을 듣고 그곳에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려고 일본으로 떠났다.
인도의 선교사로 파견된 예수회 회원인 로베르또 데 노빌리(Roberto de Nobili, 1577∼1656) 신부는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귀족 출신으로서 그리스도교의 복음을 현지인들이 더 쉽게 이해하고 무리없이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인도인들의 관습과 종교적인 표현에 어느 정도 적응시킬 필요를 느끼고 적응주의 (Accomodatio)에 입각한 선교를 하였다.
1605년부터 그는 인도의 남부인 마두라에서 힌두교의 바라문처럼 생활하였고, 고행자의 금욕적인 생활을 하였다. 그는 철저하게 인도인이 되려고 결심하고 인도인들의 종교 언어인 산스크리트어를 배우고 그들의 경전의 내용과 복음의 내용을 연결시켜 설교하면서 선교하였다. 그는 유일하신 하느님의 본성을 훼손하지 않고 우상적인 혐의가 없는 한 그리스도교의 전례에 인도 종교의 전통적인 관습이 표현되도록 배려하였다.
예를 들면 바라문의 예복을 전례복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백단유를 성유로 사용하며 공동으로 몸을 씻는 바라문의 정결 예식의 일부를 받아들였다. 또 일정한 모양의 삭발을 도입하고 송아지의 재로 이마에 표시하는 관습들을 받아들였다.
인도인들의 종교 심성과 관습의 시각에서 이질감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그리스도교의 근본 정신을 받아들이는 선교활동을 함으로써 1650년경 마두라 지역에는 이미 4만 명의 그리스도교 신자로 불어났다. 그레고리오 15세 교황(1621∼1623)은 1623년 일정한 조건 안에서 적응주의적인 선교방식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1600년대 말에 이러한 적응주의에 대한 논쟁이 격렬하게 일어난 끝에 1742년 베네딕도 14세 교황(1740∼1758)은 그러한 선교방식을 단죄하였다. 이로 인해 인도에서 그리스도교의 선교활동은 기반을 잃고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유럽의 선교사들이 원주민들의 종교와 그들의 시민적인 관습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이 범신론적인 사고방식에서 오해되고 오염되지 않을까 걱정하며 그리스도교의 순수성을 수호하고자 노력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현지의 전통과 관습과 조화시키는 개방적인 가능성보다는 유럽화된 그리스도교의 외적인 형태까지 모방하도록 하는 획일주의적인 선교방식을 고수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 결과 그리스도교의 보편성이 많이 훼손되고 형식주의라는 오해까지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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