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만으로는 부족하다
『너희는 어리석기도 하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그렇게도 믿기 어려우냐? 그리스도는 영광을 차지하기 전에 그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루가 24, 25~26). 이 말씀은 예수께서 당신 제자들이 당신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꾸짖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이성만으로 무엇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최고의 사랑으로 이해되는 분입니다. 사랑하지 않고는 누구든지 무엇을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 이성만으로는 가장 본질적인 가치들을 볼 시각을 상실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바로 이러한 인간 이성의 합리성이었습니다. 사두가이들과 바리사이들, 당시 정치인들은 모두 자기 합리성을 능가하는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들을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나는 하느님의 무한한 선과 사랑은 인간의 합리성으로는 모두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오늘날도 인간 이성의 합리성으로 하느님의 생명을 죽이고 종교를 죽이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인간 이성에 대한 하느님 논리의 승리입니다.
■부활, 이데올로기의 죽음
불변하는 역사의 무대 위에서 활동하는 인간은 어떤 특정 원인들의 노예가 됩니다. 인간은 하나의 수단이 되고 어떤 특정의 이유가 목적이 됩니다. 그리고 인간은 이러한 이유 때문에 희생됩니다. 이것은 공산주의 이후 수없이 생겨난 이데올로기들에 의해 인간이 조롱당한 경험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인간이 만든 어떤 이유(이데올로기)때문에 희생되어야 할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인간 인격 자체로 존중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어떤 고상한 이유(이데올로기)때문에 십자가 상에서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오직 하느님을 위해, 인간을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인간 이유(이데올로기)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였다면 예수 부활은 인간 이데올로기의 죽음입니다.
교회의 범주들은 신앙과 불신앙, 은총과 죄, 죄와 구원입니다. 이것들은 세상을 이긴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서 끌어온 범주들입니다. 예수부활은 우리에게 새로운 가치평가 기준이 되었습니다.
■역사의 주도자, 하느님
역사의 주도자는 인간이념도 아니고 더욱이 죽음도 아닙니다. 부활은 하느님께서 역사의 고삐를 잡으신다는 뜻입니다. 역사의 진행을 죽음과 같은 자연의 법칙에 다 맡기는 것이 아니라 당신 스스로 역사의 주도자가 되심을 말합니다. 죽음의 보편적 법이 궁극적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궁극적인 법칙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죽음이 삶의 목적으로 극복된 것은 크나큰 희망입니다.
■부활은 유물론의 극복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참 사람으로 육체를 가지신 분으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부활 메시지에서 육체를 배제하지 말아야 합니다. 육체의 부활을 배제하면 이것은 곧 영의 세계를 분리하고 물질은 영원히 구원받지 못하는 하느님 능력 밖의 것이 됩니다. 예수부활은 물질에 대한 영의 우선권을 확정짓는 것입니다. 육체와 물질은 예수부활로 구원되어 하느님 피조물 전체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모든 형태의 유물론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맑스의 유물론만이 아니라 물질을 섬기는 소비사회, 모든 지성적 능력을 마비시키는 쾌락주의의 삶도 유물론의 삶입니다. 예수부활은 또한 우리의 유물론적 신앙에 경고를 줍니다. 물질적인 부의 번창을 위해 기도하는 모든 유물론적 신앙생활은 예수부활을 통하여 모든 물질을 영에 예속시키는 참된 신앙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부활은 사랑의 승리
또스또예프스키는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랑의 승리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어느 누구나 어떤 것을「대항」하거나「거슬러」또는「반대해서」죽으시지 않고 모든 것을「위해서」죽으셨습니다. 그분의 피흘림이 또 다른 피흘림을 유발하는 그러한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화해와 사랑을 위한 것이었고, 복수나 적개심 미움의 종말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분의 부활은『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라는 말의 인격화된 진리입니다(라찡거 추기경). 부활을 통하여 교회는 언제나 선한 자의 무능력을 경험하면서 사랑이 이 세상에서 참되고 궁극적인 힘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예수부활은 선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당시 모든 사람이 다 경험한 것은 아닙니다. 그분의 부활이 죽은 자가 소생한 것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부활은 옛날의 생명에도 되돌아간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자연법칙에 예속되는 일도 없고 하느님의 자유 안에 있는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삶입니다.
만일 우리가 부활하신 그분을 이해하려면 꼭 필요한 기관이 곧 사랑입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뵙기 위해 먼저 신앙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 제자들은 부활에 대해선 상상도 하지 않았고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부활하신 분이 그들의 신앙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주님을 뵈 온 제자들은 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보는 것은 사랑이 되고 증거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부활은 호기심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명이고 선교입니다. 주 참으로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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