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사람 아흔 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하늘나라에서는 더욱 기뻐할 것이다』
언제나 나는 이 성가를 듣고 부를 때마다 마음 깊은 한 곳에는 진한 눈물이 고여옴을 느끼곤 한다.
물론 아직까지도 내가 완전히 회개한 자라고 생각지는 않지만, 어쨌든 하느님께서 그 하고 많은 선한 이들을 제쳐두고 이 죄 많고 죽을 수밖에 없었던 내게 그 자비하신 손길을 뻗치셨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넉넉히 눈물겹고 또 눈물겨운 것이다.
더불어 부끄럽기 그지없는 나의 지난 삶이지만, 그 삶 위에 역사하신 하느님의 손길만큼은 숨길 수가 없어 언젠가는 꼭 세상 모든 이에게 큰소리로 외치리라는 소망을 품어왔다. 그 소망을 이런 식으로 허락해 주신 하느님 자비에 다시 감사드리며 나의 이 외침이 보다 진솔하고 참된 고백이 되도록 하느님께서 끝까지 함께 해주시길 빌고 싶다. 그리고 이 외침이 아직도 전날의 나와 같이 어둠에 묻혀 마구잡이로 죄 속에 살아가는 이들의 가슴에 닿아, 단 한 사람만이라도 어둠에서 벗어나 빛으로 향해 몸을 돌이킬 수 있는 용기를 준다면 나의 어둠의 세월도 하느님 안에서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해낼 것만 같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실로 나는 희망이라고는 하나 없는 완전 어둠의 자식이었다.
겨우 서른셋의 나이에 알콜중독자에다 폐결핵환자였으며 거리의 폭력배로 통했던 나의 이미 이 세상 삶에 대해 어떤 희망도 흥미도 책임도 느낄 수 없이 그저 죽지 못해 살수 밖에 없는 그런 삶을 마지못해 연장시키고 있을 따름이었다.
물론 내가 그렇게 되기까진 어떤 이유가 있었다고 내 딴에는 스스로에게 비겁한 변명을 하기로 하였다.
내 나이 7살 되던 해에 다치게 된 한 쪽 눈 때문이라고, 그리고 그 후 잘못된 교우관계 탓이고 환경 탓이라고 실로 핑계를 찾으려면 끝도 없지만, 어떻든 나는 스스로를 운명의 희생자인 양 여기며 막 살아온 그것이 가장 무서운 죄였음을 이제는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다.
7살 때의 사고는 정말 우연찮게 일어났다. 어머니를 따라 자주 놀러 다니던 어머니 친구분댁에 내 또래의 아이 하나가 있었다. 그 아이와 내가 어느 날 화살놀이를 하던 중, 그만 그 아이가 쏜 장남감 화살이 내 한쪽 눈을 너무도 정확하게 명중시키고야 말았다.
그 결과 내 한 쪽 눈의 수정체는 그 자리에서 파열됐고, 어머니의 피나는 노력의 대가도 없이 그 후 나는 한쪽 눈의 시력을 영영 상실한 채 이른바 애꾸눈의 운명을 걷게 되었다.
국민학교와 중학교 2년 때까진 그래도 그게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진 않았다. 그런대로 나는 잘 적응해 나갔고 성적도 우수했으며 성격도 대체적으로 온화했던 것 같다.
그러나 중3 무렵,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나는 점점 나의 잃어버린 한쪽 눈이 신경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비관과 원망, 우울과 자학의 강도가 서서히 깊어갔고 급기야 술과 담배도 입에 대기 시작했다. 그 뿐 아니라 그때 이미 태권도 유단자였던 나는 강인한 체격과 더불어 조금씩 폭력을 휘두르는 회수가 잦아졌다.
고등학교에 접어들면서 나의 그런 자학적인 태도는 더 심각해졌다. 담배와 술을 대낮에도 내놓고 했는가 하면, 걸핏하면 싸움질을 하여 상대방에게 전치 몇 주 이상의 부상을 입히곤 하였다.
어머니는 그런 나 때문에 심장병이 나셨고, 부유했던 집안 살림도 내가 저지른 사고들을 수습하느라 날로 기울어져 갔다. 설상가상으로 선장이셨던 아버지의 배가 암초에 걸려 침몰함으로써 기울던 가세는 급격히 기울어져 얼마 안 있어 우리는 말 그대로 빚더미 위에 앉게 되었다. 그 넓은 집도 넉넉한 살림도 빚으로 다 날아가고 급기야 우리는 길거리에 나와 앉게 되었다. 불행중 다행으로 그래도 남은 돈으로 빈민가에 10평도 채 못 되는 서민아파트를 구할 수가 있어 우리는 그나마 몸을 의지할 수 있었다. 당시 우리는 군식구까지 모시고 있었으므로 많은 형제들과 더불어 가족수는 10명을 초과하였다. 때문에 그 작은 아파트는 가히 전쟁터를 방불케 하였다. 그런 환경에서 나란 존재는 실지로 애물단지이다 못해 원수덩이 그 자체였다.
비뚤어져가던 나의 성격은 그런 것을 구실삼아 더욱 비뚤어져 갔고 드디어 나는 집에서든 학교에서든 동네에서든 아무도 말리지 못할 폭력배이자 안하무인이 되고 말았다. 당연한 결과로 학교에서는 퇴학조치 당했다.
퇴학 이후 나의 삶은 물론 더욱 나빠져만 갔다. 하루 종일 나와 비슷한 거리의 친구들과 어울려 술과 싸움질, 그리고 경찰서를 뻔질나게 들락거렸다.
결국 나의 소중한 청년기는 이렇게 허무하게 비참히 흘러갔다. 하긴 돌아보면 한두 번쯤은 스스로를 자성하고 다시 공부를 시작해보기도 했고 태권도 도장을 차려 나름대로 자립의 길을 마련해보려 애쓴 적도 없진 않았다. 그러나 다른 것은 몰라도 일찍부터 붙잡혀버린 술의 마수에서 도망쳐나올 만큼 나는 강하지 못했다.
악화된 경영난과 심한 주벽으로 태권도 도장마저 남의 손으로 넘어갔을 때 나는 처음으로 자살을 시도했었다. 그러나 그 자살은 어머니의 심장병과 조금씩 진행되던 나의 위계양만 악화시킨 꼴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나의 주벽은 개선되지 못했다. 자살소동과 위세척 후 악화된 위염으로 연신 고통을 당하면서도 술을 끊을 수도, 아니 끊을 생각조차 나는 할 수가 없었다.
「살아 무엇하나 … 」이런 생각이 나의 삶을 그저 되는대로 이끌어 가고 있었다. 물론 싸움질도, 난동도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나는 피를 토하면서도 술을 마시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의 심각한 사태에 이르렀다. 하루 종일 두문불출하고 방구석에 누워 계속 들이키는게 소주 2홉들이 예닐곱 병, 그러자니 그 건장했던 신체도 대꼬쟁이처럼 야위어서 마구 휘청거렸다.
가족들은 더 이상 나를 상관하지 않았다. 나는 완전히 버려진 존재였고 쓰레기 같은 존재였으며, 온 가족을 불행에 빠뜨리는 암 같은 존재에 불과했다.
그러나 어머니만큼은 끝내 나를 저버리지 못하셨다. 연신 3일을 계속해서 피를 토하자, 어머니께서는 동생에게 눈물로 애원하며 어디든 술을 끊을 수 있는 곳으로 나를 데려가라고 사정했다.
항상 어서 죽기만을 자처하던 나도 막상 그쯤 되자 어떻게든 살고 싶어 순순히 동생을 따라 나섰다.
동생이 나를 데리고 간 곳은 광주에 있는 성요한 정신병원이었다. 거기서 나는 비로소 내가 알코올중독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진실로 그 사실이 실감되고 수긍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얼마만이라도 술을 끊어야만 살 것 같았기에 그저 주어진 환경에 순응했을 따름이었다.
첫날은 무척 고통스러웠지만 병원 측에서 주는 약을 먹고 그런대로 잘 넘겼다. 둘째날 셋째날도 생각보다 수월하게 지냈다. 나흘쯤 될 무렵엔 오히려 그 지옥 같은 집에서 떠나와 이런 깔끔하고 따뜻한 환경 속에서 생활한다는 사실이 꿈처럼 느껴질 만큼 어느새 그 생활에 맛들여갔다.
그러나 나의 운명은 그대로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입원한지 닷새 만에 행한 검진결과 내가 폐결핵을 앓고 있음이 판명된 것이다.
실로 천만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리 그 지경이 되었어도 신체건강 하나만큼은 큰 소리 칠 수 있었던 나로서 폐병환자라는 딱지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단어에 불과했다.
나의 놀라움과 실망이 어떠하든, 일단 전염성 질환자로 판명된 이상 병원 측에선 그 즉시 나를 퇴원시킬 수 밖에 없었다.
『결핵부터 치료한 후 다시 오시오!』
그 병원문을 쫓기듯 나서면서 나는 다시 한 번 자살을 생각했다. 그 시도는 그 후 한 달쯤 뒤에 보건소에서 타온 결핵약을 한달분째 홀랑 털어먹는 것으로 낙찰을 보았다. 물론 또 실패였다.
나의 잇따른 자살소동에 질린 어머니는 생각다 못해 나를 다시 통제가 가능한 수용시설로 입원시키고야 말았다.
그곳도 역시 가톨릭계 시설이었는데 나와 같이 가난한 결핵환자들을 위해 지어진 자선 결핵 요양원이었다.
이렇게 어떤 종교에도 전혀 문외한이었던 내가 가장 몹쓸 지병으로 인해 연거푸 가톨릭계 시설과 인연을 맺게 된 것도 지금 생각하니 하느님의 크신 자비 덕분이었다.
그러나 실지로 나 자신으로서는 내가 다시 수용시설에 입원된 것이 그리 달갑지만은 아니했다. 물론 병동 측도 알콜중독자이며 폭력배였고 자살소동을 두 번이나 벌렸노라고 노골적으로 털어놓는 나를 할 수만 있었다면 사양하고 싶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나의 첫 인상도 그리 좋았을리 만무했다. 다친 눈도 눈이려니와 싸움질로 부러진 앞니와 운동으로 단련된 체격 또한 환자라고 치부할 수 없을 만큼 부랑해 보였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미 하느님께선 그 죄많고 못난 놈에게 일단 시작하신 구원의 역사를 멈추시지 않으셨다. 어떻든 나는 1989년 1월24일 입원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입원한 바로 다음날 하느님께선 결정적인 큰일을 벌이셨는데 그건 다름아닌 L을 그 요양원의 책임간호사로 부임시킨신 것이었다.
L은 당시 거의 하느님에게 사로잡혀 있던 독실한 신자이자 현재 나의 아내로서 나에겐 곧 하느님이 보내신 천사였고 구원자였다.
허나 우리의 첫 출발은 병동 내에서 가장 문제 많은 요주의 환자와 새로 부임한 수간호사라는 그런 서먹한 공적인 관계에서 시작되었다.
L역시 다른 기존 간호사들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나를 경계하는 듯 했다. 그러나 천성적으로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였던 그녀는 얼마 안 있어 경계심을 버리고 다른 환자들과 똑같은 한 인격체로 대해주었다. 그뿐 아니라 그녀는 다른 직원들 앞에서 가끔 나를 편들어 주었는데, 나는 그런 작은 친절들을 통해 처음으로 이 세상도 그저 저주스러운 곳만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소금이 있음으로 해서 음식이 음식다운 맛이 있고, 신자들이 또 본연의 사명을 다함으로써 이 세상에 살맛을 부여한다는 어느 신부님의 강론 말씀은 정말 그대로 진실이었다.
아무튼 나는 입원한지 한 달 남짓 동안은 그 같은 작은 친절에 대한 의무감 비슷한 느낌으로 스스로를 극기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오랜 주벽과 생활습관이 하루아침에 바뀔 리 만무했다.
입원한지 한 달쯤 지날 무렵, 모처럼의 외출에서 아니나 다를까 나는 다시 음주하게 되었고, 그 현장을 L간호사에게 그대로 들켜버린 사건이 발생했다.
요양원 규칙도 규칙이려니와 특히 나는 알콜중독자였으므로 입원 당초로부터 일단 음주만 했다하면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강제퇴원하기로 이미 약속되어 있던 터였다.
L간호사는 나보다 더 당황스런 눈빛이었다. 그러나 마침 거리 저편에서 요양원의 실무책임자(총무)가 마주 걸어오고 있는 것을 알아챈 L은 우선 나더러 바로 이웃한 다방으로 좀 들어가자고 하였다. 총무와의 정면충돌을 피하기 위한 한 방면이었던 것이다.
그녀를 따라 다방으로 들어서면서 나는 난생 처음으로 누군가가 두렵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떤 힘도 권력도 강제도 두려운 적이 없던 나였다. 그러나 정말 그 작고 부드럽기 그지없는 한 여자의 침묵이 그 안하무인이던 나를 기죽게 하였고 부끄럽게 만들었으며 급기야 죄인처럼 고개를 떨구고 회한의 눈물을 흘리게 하고야 말았다.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나는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 나오리라곤 결단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아니 그런 말을 하느니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지」하고 생각한 나였다. 그랬던 내가 어떻게 해서 그런 말을 하며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는지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와서 곰곰 생각하면 아마도 그녀의 너무나 측은하고 안타까운 시선 때문이었던 것 같다. 실로 나는 그런류의 시선을 받아 본 적이 거의 없었기에 그에 대한 방어책 또한 내 안에 전혀 없었던 것이다.
멸시하면 갚아주고 욕하면 욕으로 언제나 맞서왔던 나로서 그 신의를 저버린 사람에 대해 그같이 자애깊은 눈길을 보낸다는 그 자체가 하나의 경이였고 충격이었다.
L은 끝내 나무라는 말투는 사용하지 않았다. 다만 용서하라는 말은 당치않는 말이며 참으로 용서하실 수 있는 분은 하느님 한 분 뿐이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이들 역시 같은 죄인이므로 실지로 누군가를 단죄할 권한은 아무에게도 주어지지 않았으나, 단체를 운영하기 위해서 필요한 규칙이 있을 따름이라고 했다. 특히나 내 경우는 직원들 사이에 재고의 여지가 없었기에 그게 문제이며 자신 역시 일단 들이킨 술보다 앞으로 계속될 음주벽을 어떻게 감당할지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그것이 또 같이 입원한 동료 환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몰라 난감할 따름이라고 했다.
그녀의 그런 말들은 다시 나를 감동시키고야 말았다. 죄를 지었다면 그대로 단죄하면 그뿐인 것을 두고 그렇게도 갈등스러워 하는 모습 역시 너무도 뜻밖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내게서는 또 한 번 회한의 눈물이 솟구쳤다.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녀는 마침내 결심한 듯 내게 한 가지 제안을 해왔다. 즉 그 상태로는 요양원에 들어갈 수 없으니 그날 밤을 어디 인근 여관에서 지내고 이튿날 아침 말짱한 정신으로 귀원할 수만 있다면 이번만큼은 없었던 일로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일단 나의 의지를 한번 믿어보겠다는 것이었다.
이미 약물이나 강제적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상태임을 뻔히 아는 그녀로서 그러한 제안은 내게 퍽 무모하게까지 느껴졌다. 그러나 한편으론 고마웠고 부끄러웠다.
그 고마움에 꼭 보답하고 싶다는 마음은 그날 밤 내내 그 지독한 금단증상에서 끝까지 나를 주었고, 나는 기어이 그 제안대로 해내고야 말았다.
그 사건 이후 나의 삶은 급속도로 달라져 갔다. L을 통해 용서가 무엇이며 믿음이 무엇인지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기에 나는 나 스스로를 더 이상 저주할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내가 예비자 교리를 받겠다고 자청한 것도 바로 그 무렵의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둘러싼 사소한 문제들은 계속 일어났고 또 그럴적마다 그 문제의 해결은 언제나 L에 의해서만 가능하곤 했다.
이미 짝으로 맺어주기로 계획하신 그 분의 뜻대로 점점 얽혀드는 L과 나의 운명은 급기야 나의 일기장 사건으로 그 결말을 보았다.
(11면에 계속)
무슨 연유 끝에 찢어버린 내 일기장을 우연히 집어든 L은 거기서 나의 간절한 소망과 갈망을 알았고 자신을 붙들고 힘들게 걸음마를 시작하는 나의 숨은 노력도 알게 된 것이다.
물론 L은 많이 갈등스러워했고 주저했겠지만 오랜 기도 끝에 그 모든 것을 오직 하느님의 깊은 섭리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곧 나와의 결혼을 결심했는데 그녀로선 그 방법이 아니고선 그 공적인 자리에서 누군가를 특별히 배려해 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아무도 알지 못한 내 깊은 곳에 있는 갈망과 선을 무척도 귀하게 여겨주었는데 그것이 무엇보다 우리를 강하게 밀착시켜 주었다.
우리의 결혼 발표는 예상한대로 주위의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어 여기저기서 반대가 빗발치듯 날아왔다. 그 중 가장 큰 난공불락은 L의 친정 부모님이었다. 특히나 L의 아버님(지금의 장인어른)께서는 오랜 교직생활을 청산하고 당시 동양철학관을 운영하고 계셨는데 그분이 뽑아본 나의 운명은 그야말로 폭발 직전의 용광로였다. 아버님의 지론으론 그런 운명에 처한 사람과 결혼한다는 것은 같이 죽거나 죽을 고생을 할 수 밖에 없음을 의미한다고 했다.
그러나 L의 신앙은 아버지의 온갖 설득과 반대보다 강했다. 그녀는 끝내 그 모든 것보다 강하신 하느님을 믿었고 조금씩 변화되는 나의 회심을 더 귀하게 여겨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L의 아버님의 예언은 거의 그대로 적중했다. 그 요양원 내 작은 경당에서 병동 가족들과 몇몇 친한 지기를 모시고 조촐하기 이를 데 없는 혼배를 올린지 채 일주일이 못되어 우리의 신혼은 말 그대로 산산이 폭파될 지경에 이르고 말았던 것이다.
당시 우리는 비록 결혼은 했지만 결핵치료도 계속 해야했고, 또 음주의 위험도 컸으므로 폐가 깨끗이 나을 때까지만이라도 그냥 나는 환자신분으로 그 요양원에 남아 있기로 했고 L 또한 그대로 책임 간호사로서 맡은바 임무를 다하기로 미리 약속되어 있었다. 때문에 말이 신혼이지 우리는 식사마저도 환자와 직원으로 갈라져 각각 따로 할 수 밖에 없는 그런 불편하고 어색한 신혼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우리는 그렇게 불편하더라도 일단 결혼함으로써 둘 사이가 보다 떳떳하고 확실한 관계가 되며, 또 그것이 서로에게나 다른 병동 가족들에게도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앞당겨 결혼을 택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나는, 그 불평한 신혼에 따르는 불만과 동료 환자들의 질시 비슷한 야유 등을 소화시킬 만큼도 강하지 못했다.
영세식을 며칠 앞두고, 약속된 행복에의 꿈이 바야흐로 시작되려는 그 순간 나는 끝내 다시 음주하게 되었고, 그것을 계기로 시작된 내안의 절망과 자포자기적 마음은 그렇잖아도 주위를 빙빙돌며 기회만을 엿보던 마귀들에겐 더없이 좋은 기회를 제공해 준 셈이 되고 말았다.
본래 자기네들 것이었던 한 영혼을 하느님께 빼앗기려던 그 아슬아슬한 순간에 다시 찾은 셈인만큼, 마귀들은 내 안에서 길길이 날뛰었고, 나는 전보다 더 지독한 최악의 상태로 굴러 떨어졌다.
그 결과 그 요양원에서는 당연히 강제퇴원 당하였고 L 역시 나를 따라 무작정 거리를 헤매이게 되었다.
『L이 잘못 판단했고 어리석었다!』
이것이 당시 L과 관련된 대부분 사람들의 생각이었으므로 우리는 더더욱 어떠한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L은 나를 포기하지 않았고, 하느님의 자비를 결코 의심치 않았다. 그렇더라도 그녀는 장인어른의 예언대로 진짜 죽을 고생을 나 대신 치루어 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요양원을 나와 이어 내가 거치게 된 병원만도 약 석달 사이에 무려 8개 병원이었다. 경상대학 부속병원을 비롯해서 광주 성요한 정신병원, 문산 요양원, 진주 의료원 응급실, 강남병원 응급실, 부산대학병원 응급실, 고신의료원 응급실 및 정신과 병동, 그리고 마지막 부산 구덕 요양원에 이르기까지의 병력만 보더라도 당시 나의 상태가 어떠했는지, 넉넉히 짐작되고도 남을 것 같다.
그 사이 L과 나는, 나의 연이은 탈출 소동과 폭음으로 피투성이 진흙투성이가 되어 거리를 헤매기도 했고, 어쩌다 비를 피해 들어선 상점가 처마에서 상거지 취급을 받아 그대로 쫒겨나는가 하면, 누구도 차를 세워주지 않아 빗속을 질퍽이며 끝도 없는 행군을 하기로 부지기수였다.
그 중 지금까지도 가슴 아프게 느껴지는 것은 나로 인하여 L이 같이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하고 멸시 받아야 했으며 가까운 사람들을 있는 대로 실망시켜야 했던 바로 그 점이었다.
그러나 L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위하여 대신 피를 흘리신 그 수난을 묵상하며 한마디 불평이나 원망없이 그 모든 것을 용케도 잘 견디어 주었다.
그 덕분인지, 아니면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때가 차서인지 나는 마지막으로 들어간 구덕 요양원에서 두 달간을 견디어서 비로서 제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그때 아내는 나의 뒷바라지를 위해 어느 시골의원에 간호사로 취직해 있었다.
그 시골의원도 역시 특수 시설이었는데 나환자들을 위한 가톨릭계 비 영리기관이었다.
나의 영세는 바로 그곳 관할 본당신부님에 의해 근 5개월에 걸친 지옥생활에서 풀려난 직후에 이루어졌다. 그것도 물론 L의 신앙을 보고 별다른 교육이나 찰고 없이 그저 덤으로 주신 선물이었다.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 덕분으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 죄인들이 하느님과 화해하게 되었고, 급기야 그분의 자녀로서의 특권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교리를 진실로 나는 L을 통해 그대로 실감하게 된 셈이었다.
허나 나를 다시 억울하게 놓친 마귀들은 끈질기게도 계속 나의 주위를 뱅뱅돌며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실로 나는 놓치기에 너무도 아까운 포획물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어느 정도 안정이 되고 잘 살게 될 때가 가장 위험한 때임을 나는 미리 알았어야만 했다.
그러나 언제나 뉘우침은 늦고, 마귀는 너무나 민첩하게 행동함으로써, 우리는 번번히 그들에게 농락당하곤 한다.
아내의 전적인 헌신과 나의 자성으로 영세 이후 한 동안은 그런대로 평화스러운 나날을 맞이했던 우리는 실로 말 그대로「고진감래」였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얼마 후 나 또한 같은 시설에 사무직 자리를 얻어 그동안에 진 빚도 어느 정도 갚게 되고, 궁색하나마 그 시골의원에 딸린 사택에서 이것저것 신혼에 필요한 살림살이도 장만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우리의 첫 시작부터 너무나 잘 아는 이웃분들은 그런 우리를 칭찬해마지 않았으며 나의 회심을 진심으로 기뻐해 주었다.
그러나 그쯤되자 나는 자신이 실로 무어나 되는 것 같은 으쓱함을 느끼기 시작했고, 마침내「알콜중독」이라는 판명마저 아마 잘못된 술 습관 때문에 일어난 일시적 신체증상이라는 위험한 생각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생각은 급기야 아내와 사소한 다툼을 함으로써 더욱 확고하게 굳어져 갔고, 그것을 마귀들은 정말 기막히게 절호의 기회로 이용하고야 말았다. 아내와 처음으로 다투게 된 것은 오토바이 때문이었다.
생활이 약간 안정되자 조금씩 교만해진 나는 교통상 불편하다는 핑계로 오토바이를 한 대 구입하길 원했고 당시 나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아내는 내 성격상 오토바이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였다. 그리고 덧붙이길『알콜중독자로서 기동력이 있으면 더더욱 순간적으로 다시 돌이키지 못할 위험이 있으니 차라리 교통이 불편한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부지중에 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극히 당연한 조언이었지만 당시 나는 스스로 결코 알콜중독자가 아니라고 믿고 있었으므로 그 말에 분개했고, 마치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나는 그 길로 다시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술김에 오기로 통장째 들고 나가 결국 원하던 오토바이를 구입하고야 말았다.
그런 나에게 하느님의 진노가 없을 리 만무했다.
첫 번째 오토바이를 산 지 일주일도 채 못 되어 술주정으로 왕창 부수고 억지로 병원에 입원한 나는 그 병원에서 퇴원하는 즉시, 또 다시 외상으로 다른 오토바이를 구입하게 되었는데 그 두 번째 오토바이를 조립해서 집으로 오던 도중 나는 급기야 나의 죄값을 치르고야 말았다.
시속 1백30㎞로 질주하던 나는 길가에 세워둔 경운기를 미처 피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정면 충돌을 하고만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그대로 경운기 밑으로 처박혔고 경운기는 그 충격으로 홀랑 길 가장자리 아래로 뒤집혀지고 말았다.
목격자와 경찰에 의해 나는 즉시 병원으로 후송되긴 했으나 당시 구경꾼들 사이에선 이미 나는 죽었다고 소문들이 났다.
실지로 2개소의 병원을 거쳐 마지막으로 옮겨간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진단역시「소생 거의 불가능」이었다.
컴퓨터 사진 촬영 결과 두개골은 전면 타박상을 입고 부어올라 호흡중추를 압박하려 했고, 목뼈 하나가 부러져 조금만 움직여도 척수강내 신경을 건드릴 참이었으며, 광대뼈가 부서져 내려앉으면서 내출혈이 된 게 그대로 폐에 흡인되었다고 했다. 때문에 가뜩이나 약한 폐는 흡인으로 인해 곧 폐렴으로 진행되었고 그로서 당장 시급한 외과적 수술 및 목뼈의 견인 장치도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다고 했다.
그때 아내는 이미 임신 9개월의 만삭이 된 몸이었다. 그러나 나를 다시 되살려 내기 위해서 그녀는 또 그런 상태였을 망정 내 대신 죽을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순간을 다투는 그 무수하고 긴박한 간호를 잠시의 숨돌릴 틈도 없이 계속해야만 했고 며칠뒤 고비를 넘긴 후에도 만삭의 몸으로 분만직전까지 한 시간이 넘는 통근길을 오가며 낮엔 직장, 밤에는 나의 간병으로 24시간의 중노동을 감수 해내야만 했다.
불행중 다행으로 아기는 무사했고 또 분만 역시 아무 문제없이 이루어졌다. 다만 내가 평생토록 미안하고 미안한 것은 L이 나로 인하여 산후 회복도 채 안된 몸으로 나의 보호자가 되어야 했고 내가 엉망으로 미루어 둔 나의 일거리마저 그 휴가기간에 대신 다 처리해야 했던 점이다.
그러나 아내는 또 다시 하느님 안에서 그 모든 것을 받아들였기에 그저 묵묵히 자신이 해야할 바를 충실하게 감당해나갔다.
사람들의 말을 빌면 아내의 그런 태도와 믿음이 틀림없이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인 하나의 기적이라고 들 했다.
나 역시 나의 소생과 치유를 그 같은 기적으로 믿고 있다. 어떻든 나는 살아났고 비록 약간의 기억력 감퇴라는 후유증이 있을망정, 어떠한 신체적 손상이나 불구됨이 없이 말짱하게 치유되고 만 것이다.
이렇게 하여 나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살아났고 새 생명을 부여 받았으니 지금의 내 목숨이 결코 나 자신의 것만은 아닌 줄 안다.
더군다나 현재의 내가 존재할 수 있기 위해 L이 나 대신 그 죽을 대가를 치른 덕분이고 L 역시 그 모든 것 또한 하느님의 자비 덕분이었다 하니 나는 이래저래 사람과 하느님께 겹겹으로 빚을 진 셈이 되고 말았다. 성서에『많이 용서받은 사람은 많이 사랑한다』는 말씀이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이 덤으로 받은 생을 결코 더 이상 낭비할 순 없을 것이다.
비록 아직도 여전히 거듭거듭 죄를 짓고 하느님께 계속 실망만을 안겨드리고 있을지라도 언젠가는 기필코 그 모든 것을 뛰어 넘어 나를 끝까지 기다려주고 용서해주신 하느님께 참다운 예배를 드릴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더불어 내가 그 캄캄한 어둠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던 그때, 나를 도와 끝까지 하느님께로 데려간 L을 본받아 나 역시 남은 생을 송두리째 바쳐서 전날의 나와 마찬가지의 상태에 있는 벗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 나는 통신으로나마 신학원 공부를 하고 있고, 재속 프란치스꼬회와 본당내 소공동체에 가입하여 기도와 묵상, 친교를 통해 나를 지금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마귀들과 맞서고 있다.
실제로 구원받기 위한 조건이라든가 자격으로 친다면 나는 결코 해당사항이 없는 사람이었기에, 더더욱 이 세상에 불가능이라든가 구제불능이라든가 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음을 굳게 믿는다. 구원은 오로지 한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어쩌지 못하는 사랑의 결과일 따름이며 우리 쪽에 요구되는 것은 무조건 그 사실을 믿고 용감하게 그 빛을 향하여 몸을 돌이키는 일뿐일 것이다. 때문에 나의 이 부끄러운 고백은 오로지 그 사실이 진실임을 믿게 하려는 것이고, 아직도 여전히 존재하는 마귀들의 존재가 언제라도 회개하려는 사람들을 걸어 넘어뜨리려 하고 있으니 그 유혹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몸부림일 따름이다.
끝으로 다시 한 번 이런 기회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그동안 현재의 내가 있기까지 도움의 손길을 아끼지 않았던 모든 은인들에게도 하느님의 갚음이 풍성하길 빌면서 이만 줄이고자 한다.
『하늘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의 구원받는 자에게 평화!』
<끝>
◆ 당선소감 - 김삼명
“당선 기적에 감사 … 활자화 두려운 마음,,
제게 또 다시 이런 기적을 베푸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죄스럽고 부끄럽기만한 저의 지나온 삶의 고백이 정작 지면으로 활자화되어 나가게 된다는 사실이 두렵고도 떨립니다.
어떻든 이 일 또한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일이라 믿으며 이 일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뜻이 그대로 이루어지길 바랄 따름입니다.
그리고 저의 글을 뽑아 주신 심사위원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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