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년 3월 31일
아틀랜틱시티와 체리힐에 레지오가 생긴 지 얼마 되진 않았지만 여러 단원들이 열심히 준비하여 아치에스는 잘 진행되었다. 별첨 프로그램을 어제 다 완성해 주었더니 컴퓨터에 저장해 두었다. 내년부터는 내가 없어도 이 프로그램과 녹음 테이프를 참고하면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늘의 아치에스 행사에 모두들 깊은 신심으로 열심히 참여해 주어 뜻 있는 행사가 되었다. 오늘을 기해 양 본당의 레지오가 정착되기를 주님께 기도드렸다. 한국에 주문한 대형 벡실리움과 단기들이 도착 안 돼 조금은 섭섭했지만 내년 행사 때나 다른 행사 때 어떻게 사용해야 되는가를 알려주었다.
부활절이 되면 이곳에서의 생활도 만 3개월이 된다. 일단 인꼴라 마리애 단원으로서의 활동 기간은 다 채워지는 것이므로 실적은 미미하지만 모든 것의 결실은 주님께 맡겨드리고 앵커리지로 갈까 생각 중이다.
■92년 4월 1일
오늘따라 아내가 무척이나 그리워진다.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키 어려운 몽매한 정신이 나를 한없이 불안과 초조의 골짜기로 이끌어가더니 어렴풋이 정신이 들면서 아내의 얼굴이 선명히 떠올랐다.
보고 싶은 생각을 떨치기 힘들어 눈을 감고 명상에 잠기며 최호길 신부님께서 소개해주신 기도문을 생각했다. 최 신부님은 LA의 밸리성당에서 있은 사순 특강에서 강의 말미에「어느 평신도의 묵상」이라고 소개하고 낭송하신 기도문의 완성을 나에게 부탁하셨는데 근 10여 일 지나도록 마무리를 하지 못한 상태였다.
아내를 그리며 애틋해진 마음이 어느덧 지난 날의 나의 인생역정에서 겪었던 수많은 희비의 사건들을 되새기게 되었고「고통의 십자가의 길」을 걷다 급기야는 이렇게 싸늘한 아파트에 새벽 찬 바람이 문틈으로 새어들어와 몸을 움츠리고 있는 나의 모습이란….
참으로 주님의 사도가 되기 위해, 보람된 생활을 하고자, 모든 단원들에게 등불이 되어 보고자 야무진 마음을 먹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이 연약한 인간의 마음이 아닌가 생각해 봤다.
그러나 사순 제4주간을 보내면서 지금까지의 나의 생활을 다시 한 번 점검해 보고 주님께 새로운 마음으로 매달리는 기도문을 진솔히 써보기로 했다.
국선도 수련 이후 다 나은 듯 하던 눈 증세가 그저께 또 나타나며 머리가 계속 묵직하게 아파왔다. 장로교 이상인 집사와 만나 책 2권(「무엇을 하는 사람들인가?」「무상을 넘어서」)을 전해주었다.
■92년 4월 3일
체리힐의 예비자 교리 제4교시가 있는 날이었다. 지난 시간까지 3시간에 걸쳐「인생론」강의를 모두 마쳤다. 오늘부터는 본격적인 교리에 들어가야 한다.
학창시절과 청년시절 태권도를 최고의 이상으로 알고 전력투구하셨고 지금도 태권도를 가르치는 무덕관을 운영하는 황기 관장님을 찾아뵙겠다고 연락드렸다. 관장님 역시 무척이나 반가워하셨다.
아내가 올 날이 10일 앞으로 다가왔다. 마치 결혼 날짜 임박하여 시간을 헤아리며 애 태우는 신랑의 기분이라고나 할까….
모든 것이 자꾸 회의스럽게 느껴지고 약해지려는 요즈음의 나다. 어떻게 해야 새로운 정신으로 의욕 찬 나날이 될 수 있읕까 걱정이 앞선다.
■92년 4월 4일
황기 관장님을 만나뵈러 출발했다. 정신통일 기의완급 중심이동 정의 정직 인내 겸손을 도장 정면에 크게 써붙이고 상단에는 태극기를 높이 게양한 엄숙한 분위기에서 땀 흘리며 수련하며 무도인의 꿈을 키우던 젊은 날에 그분은 우리의 꿈이었으며 정신적인 지주였다.
관장님 댁에 도착했다. 큰 절을 올리니 황 관장님은 맞절까지 하시며 인사를 받아주시어 몸둘 바를 몰랐다.
1963년경부터 시작된 무도인 통합 바람에서부터 5ㆍ16 쿠데타 후 군사정부의 통제하에서 겪으신 그 숱한 고난과 역경을 들려주셨다. 당시 황 관장님이『무도를 경기 종목으로 채택해 경기를 벌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반대하시다가 고립되었을 때 우리 제자들은 나이가 어려 아무런 힘이 되어드리지 못해 마음 아파했다는 등 여러 가지 이야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나누었다.
마침 오늘이 중앙도장에서 승단심사가 있는 날이라 함께 도장으로 갔다. 관장님은 심사석에 앉으시며 바로 옆 자리에 나를 잡아당기시며 앉으라 하시어 나란히 앉았다. 그 옛날 심사석의 나를 생각하며 무척이나 감회가 새로웠다.
자제분 황종철 사범이 관장님의 대를 이어 모두 전수 받으셨다 한다. 도장 규모나 그 내용이 너무나 알차서 놀라웠다. 무엇보다 하나뿐인 자제가 대업을 계승 발전시킴에 손색없는 인물임을 보고 기쁘고 감사했다. 석별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저녁 8시경에 체리힐로 돌아왔다.
■92년 4월 5일
한없는 망상에 사로잡혔다.「무도인의 외길 인생」에 일생을 몸 바쳐 오신 노구(80세)의 관장님을 되새기며「젊은 시절의 나」「그동안의 나」「지금의 나」「앞으로의 나」를 3중 4중으로 겹쳐 그려가다 보니 한숨만 나왔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토론토에서 인꼴라 마리애 활동을 계속하며 태권도 도장을 경영해 볼 것인가, 체리힐과 아틀랜틱시티에서 인꼴라 마리애 활동을 하며 도장을 운영해 볼것인가, 알래스카에서 인꼴라마리애 활동을 하며 국선도를 가르칠 것인가, 라스베가스에서 인꼴라 마리애 활동을 하며 태권도와 국선도를 가르칠 것인가 등 여러 가지 선택 앞에서 요즈음 나는 무척이나 많은 갈등을 겪고 있다.
저녁 9시경 최 신부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피정 때문에 LA에 머무르고 계시는데 나날이 피정에 참가하는 신자 수가 늘어나 무척이나 기쁘다고 전하셨다. 그곳 신자들이 최 신부님의 훌륭한 강의를 듣고 성화되어 가는 분위기가 눈에 선했다.
신부님의 성공적인 피정 지도와 기뻐하시는 목소리에 서글프고 우울하던 마음이 갑자기 밝아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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