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신문 66년은 우리 민족의 복음화를 위해 신자들과 더불어 영광과 고난을 함께 짊어진 여정이었다. 이 기간 동안 본보를 통해 보도된 지면은 그대로 한국교회의 산 역사요 현대사이다. 1927년 4월1일 창간 때부터 지금까지 본지에 실린 수많은 사건들을 통해 한국교회의 발자취를 더듬어 본다. 1933년 창간 6주년 기념호(73호)를 제작한 본지는 뜻하지 않은 이유로 49년 4월1일 74호를 복간할 때까지 15년간 긴 동면에 들어간다. 따라서 본란에서는 50년대를 그 출발점으로 삼는다.
1950년대를 여는 첫 해를「성년」으로 시작한 한국교회는 그해 6월25일 전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된다. 6ㆍ25동란은 한국교회에도 예외 없는 수난이었다. 인적 물적피해는 막대했다. 전국 걸쳐 수많은 성전이 파괴되거나 약탈당했고 피납 혹은 피살된 사제, 수도자도 부지기수에 달했다.
전란과 함께 동년 10월까지 휴간의 시련을 맞았던 본보는 11월10일자 속간호에서 교구별로 피살 피납된 성직자 수도자를 포함한 피해상황을 종합, 상세히 보도하고 있다. 전쟁의 상처가 큰 만큼 군종사제들의 활약상이 더욱 빛을 발한 때였다.
51년 6월24일자 본보는 2차로 지원한 군목사제들의 명단을 공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포성과 폭음이 쉴새 없이 들리고 피비린내 나는 전지에서도 신앙의 꽃을 피우고 싸우는 장병들에게 위안과 인생의 참된 투쟁목표를 제시하며 용기와 인내력을 북돋워주고 노고와 생사를 같이 하면서 종군하고 있는 군목사제들의 활약에 대한 성과는 나날이 높아가고 있다」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던 53년 봄부터 임시수도 부산을 중심으로 한 국가재건 운동과 함께 한국교회도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다.
6ㆍ25전쟁으로 자동 해체됐던 가톨릭 학생회가 53년 2월22일 부산 범일동성당에서「대한 가톨릭 학생회」란 명칭으로 재발족된다.
이어 5월에는 가톨릭 도서관이 부산에서 개설된다. 당시 사립으로서는 한국 최초의 도서관이었다. 많은 교육자들이 각국의 교육에 관한 정보를 얻고자 이곳을 찾았고, 심리학 경제학 등 학문을 연구하는 많은 이들에게 연구 토론회 장소로 이용되었다고 본보는 전하고 있다.
본보 55년 12월25일자는『신 문예운동의 주창자로서 근대문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사학가 육당 최남선 선생』의 개종소식과「인생과 종교」란 제목으로 육당의 고백을 특집으로 싣고 있다.
이후 국문학계의 권위자 이숭녕 박사(당시 서울대 교수)등 당대의 거물들이 계속 영세 입교 혹은 개종해 한국사회 안에서 천주교회의 위상은 날로 높아간다.
뿐만 아니라 부산교구(57년 3월), 청주교구(58년 7월), 대전교구(58년 7월)가 신설되고 지목구이던 전주 광주교구가 대목구로 승격되었으며 대구 삼덕, 전주 노송동 등 본당이 증설되었고 55년 예수의 작은 자매회를 비롯해 꼰벤뚜알 프란치스꼬회(58년 10월)등 수도회의 한국 진출이 잇따르는 등 한국교회는 전후 도약기를 맞게 된다.
당시 국내 신자수는 60년말 현재 인구 2천2백65만5천명 중에 45만 1천8백8명이었고 사제 총수는 61년 4월 본보가 집계한 바에 따르면 61년 서품자 22명을 포함 4백73명이었다.
60년대의 한국교회를 포함한 세계교회는 2차 바티칸 공의회를 계기로 대변혁의 시대를 맞이한다.
1958년 10월28일 제262대 교황에 즉위한 교황 요한 23세는 59년 1월 공의회 소집을 예고하고 이듬해인 60년 1월 로마 주교 시노드를 개최함으로써 사실상 몇 년 후에 있을 공의회를 준비했다.
1962년 10월11일. 7차에 걸친 준비위원회의 끝에 역사적인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막을 올렸다. 실로 현대 교회사에서 분기점을 이룬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공의회는 65년 12월8일 폐막때까지 4차회기에 걸쳐 전례 계시 교회론 재일치 평신도 교황 등 교회의 거의 모든 사항들을 의안으로 채택, 토의했고 총 4개의 헌장과 9개의 교령, 3개의 선언문을 공포했다. 그 영향은 엄청났다.
평신도의 신원과 사명 역할이 강조되면서 평신도 운동이 고조되고 교회 재일치를 위한 논의가 활발히 전개되었다. 전례ㆍ기도서ㆍ교리서 등의 개혁은 후일「모국어 미사 전례」라는 결과를 가져왔고「그리스도교 신앙의 토착화」가 신중히 검토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들은 실로『교회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전대미문의 명제만큼 무게를 지닌 것이었다.
한국교회는 65년 1월1일부터 실시한 우리말 미사, 주요 기도문 개정(66년 7월 주교회의)등 전례개혁을 단행하고 교회 전반에 걸친 쇄신작업을 추진, 「열린교회」「세상을 위한 교회」로 거듭나기 위한 노력을 경주했다.
교회 재일치를 위한 노력도 두드러졌다. 68년 1월12일 주교회의는 각 교구에 교회 일치위원회를 설립하거나 담당신부를 임명토록 촉구하고 개신교측과 성서 공동번역을 위한 본격적인 논의에 들어갔다.
그 결실은 71년 4월3일 한국 그리스도교 사상 초유의「공동번역 신약성서」의 출판으로 나타났다. 68년 10월 병인박해로 순교한 24위가 복자위에 오르고 69년 3월 한국교회의 첫 추기경이 탄생함으로써 한국교회는 중흥기를 맞는 듯 했다.
70년대 10년간은「혼동과 진통, 성장」의 시기였다. 이 시기에 교회는 세속안에 있는 교회의 본 모습을 인정하고 끊임없이 자기쇄신과 사회질서의 쇄신을 위해 몸부림친 때였다. 교회앞에는 많은 어려움들이 산적해 있었다.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교회의 새 진로 모색, 탈농업화하면서 빚어진 과도기적 혼란, 경제성장 정책이 낳은 물질위주의 가치관 등….
그러나 무엇보다 당시 교회의 모습은 적극적인 사회 참여를 통해「하느님의 정의」를 이 땅에 실현하려는 각고의 노력에서 두드러진다.
74년 7월 당시 원주교구장이던 지학순 주교(93년 3월12일 선종)의「양심선언」은 한국 민주화 운동에 불을 붙였고, 유신체제를 통해 장기 독재를 꿈꾸는 군사정권에 그것은 중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그 해 8월12일 비상보통군법회의는 지 주교에게 내란선동 및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을 선고했다. 하느님의 정의를 부르짖던 한 성직자의 양심이 실정법에 의해 구속된 최초의 순간이었다.
같은해 인천교구 부주교 시노트(진)신부(메리놀회)에 내려진 강제 출국령도 교회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법무부는 시노트 신부가 입국목적인 종교활동 외에 유신헌법 철폐, 구속자 석방 등 정치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출국토록 조처했던 것. 결국 시노트 신부는 4월30일 10여 년간 몸 담았던 한국을 떠나야 했다.
이러한 정치 사회적 혼란 속에서도 계속해 74년 말 신자 1백만을 돌파를 기록했고, 각종 문서양식을 통일시키고 교구 행정의 체계화 능률화를 위해 교구 구조통일안을 74년 확정시키는 등 사회근대화에 적응하려는 노력을 보인다.
그러는 가운에 70년대 초반부터 싹트기 시작한 신심단체들의 활동이 꽃을 피웠고 평신도 교육이 강조되면서「성서공부」열기 또한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이처럼 격변하는 사회 속에서 혼란과 진통, 그리고 성장을 계속해온 한국교회는 또 다른 변혁의 시대, 80년대를 맞게 된다.
1984년 5월3일 오후 2시11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순교의 터전인 이 땅에 감격의 입맞춤으로 시작된 교황의 첫 한국방문은 한국사회, 언론의 관심 초첨이 되었고 천주교회에 대한 일반의 관심을 확산시켰다.
교황은 또 84년 방문에서 한국의 순교복자 103위를 성인품에 올리고 이듬해 3월12일「한국103위 순교성인 축일」을 세계 공용 로마축일표에「의무적 기념」으로 수록할 것을 명함으로써 세계교회의 추앙을 받는 명실 상부한「세계속의 성인」으로 그 위치를 확고히 했다. 교황의 두번째 한국 방문은 89년 제44차 서울 세계 성체대회 때 이루어졌다.
이와 함께 한국교회 2백주년이었던 84년 11월 2백주년 기념사업위원회는 4년여에 걸쳐 추진되어 왔던 12개의 사목회의 의안을 확정, 복음화 3세기를 향한 한국 천주교회의 좌표를 설정했다.
두 번에 걸친 교황 방한과 교회의 선교노력은 80년대 중반까지 획기적인 외적 성장을 가져왔다. 본당마다 예비자는 줄을 이었고, 한 번에 수백 명씩 영세하는 사례도 빈번했다. 74년 1백만을 넘어선 이래 11년만인 81년말 신자수는 2백만명을 돌파했다. 그야말로 한국교회가「황금기」를 구가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화려한 양적 팽창에 가려져 있던 부작용들은 곧바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대표적인 것이 수적 증가를 따르지 못하는「질적 저하」문제였다. 밀려드는 새 신자들을 받아들이기에만 급급했던 교회는 이들을 지속적으로 교육시키고 이끌어가기 위한 준비에는 소홀했다.
60~70년대 공업화로 인한 과도기를 넘기고 사회가 중산층화되면서 교회 역시 중산층화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거대한 본당, 교회안에서도 엄존하는 빈ㆍ부격차, 개인 단체간 불목, 가난한 자에 대한 무관심 등 그에 따른 폐단들은 많은 이들이 교회를 떠나게 만들었고 새로 입교하려는 이들의 발목을 붙잡았다.
과거 어둡고 혼란스러웠던 시절, 예언자적이고 선구적인 모습으로 이 민족앞에 우뚝섰던 그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게 아닌가 하는 우려도 나왔다.
이러한 당면 과제를 안고 90년대를 맞은 한국교회는 80년대 말부터 활발히 전개된 신자 재교육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가는 한편 다가올 2천년대의 복음화를 위해「초대교회」의 삶으로 돌아가려는 부단한 노력들을 기울이고 있다.
그것은 바로 92년 신자 3백만(복음화율6ㆍ7%)을 돌파한 한국교회가 참으로 이 땅의 빛과 소금이 되고자 하는 땀흘림이다.
◆ 시대별 톱뉴스
▣1920년~1940년대
1929. 12. 20=교황 비오 11세 사제서품 50주년 맞아
1931. 2. 12=바티칸에 가톨릭 방송국 설치
1931. 10. 9=조선교구 설정 1백주년 기념행사
1931. 4. 30=교황 비오 11세 에페소 공의회 1천5백주년 기념 교서 발표
1931. 5. 9.=전라남북도 감목대리 교구로 설정
1931. 5=조선교회 교세통계표 발행, 총 신자 11만6천6백94명
1933. 1. 23=서울교구장 뮈뗄 민 대주교 서거
1933.4=「천주교회보」조선교구 주교단 교서에 의해「별」지와 함께 폐간
1949. 1. 30=대구교구 초대 한인 최 주교 승픔
1949. 4. 1=천주교회보 속간「폐간 16년만에」
▣1950년대
1950. 2. 21=남한 6개 교구 연차회의, 한국 순교 복자 79위 시복 25주년 기념 새남터에 순교기념관 건립키로
1950. 11. 1=교황 비오 12세「성모 몽소승천교의」반포
1951=로마에서 제1회 신도 사도직 세계대회
1951. 12. 12=한국 최초 방인수도회「복자회」교황청 인가
1952. 3. 3=프로테스탄트 발상지 독일에서 신앙의 재일치 운동 대두
「가톨릭과 토론회 열고 진격한 자기비판」
1953. 4. 1=전국 9개 교구장 공동 사목교서「도덕은 모든 문화의 기초」발표
1954. 10.16=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통신교리 시작
1955년. 4.14=제5대 광주교구장 하롤드 현 주교 착좌
1958. 10. 9=28 제261대 교황 비오 12세 서거, 제262대 교황 요한 23세 즉위
1959. 4. 30=군정청령 제88호로 경향신문 폐간
▣1960년대
1960. 12. 11=교황 요한 23세 영국 성공회 켄터베리 대주교와 4백년만에 회담
1961. 8. 6=교황 요한 23세 사회회칙「어머니와 교사」반포
1962. 10. 18=여자수도연합회 결성 : 15개 수년회 참석
1963. 6=교황 요한 23세 서거, 제263대 교황 바오로 6세 선출
1965.1=우리말 미사 실시, 한국어 미사경본 사용시작
1967. 9. 29=제1차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 개최
1968. 7. 23=전국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 결성
1968. 10. 6=병인순교자 24위 시복:로마 바티칸 대성전에서
1968=교황 바오로 6세 회칙「후마네 비떼 : 인간생명에 관하여」반포
1968. 3. 28=한국 최초로 추기경 탄생:김수환 추기경 서임
▣1970년대
1971. 11. 14=한국 주교단 공동교서「오늘의 부조리를 극복하자」발표
1974. 7. 4=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민청학련」사건으로 구속
1975. 2. 26=한국 외방선교회 창립 : 춘계 주교회의 총회
1976. 3. 1=3. 1 명동사건 발생 : 민주 구국선언 낭독 함세웅 신부 등 사제들 다수 구속
1976. 1. 1=주교, 로마방문 의무화「앗리미나」
1976. 4. 30=전국평협「모자보건법」반대성명서 발표
1976. 6. 14=한국 천주교 주교단「인공 임신중절에 대한 우리의 태도」발표
1976. 9. 16=시성시복 추진위원회 발족, 기도문 배포 등 운동 시작
1977. 3. 20=한국교회 최초로 사순절 공동헌금 실시
1978=교황 바오로 6세 서거, 교황 요한 바오로 1세 등극, 교황 요한 바오로 1세 서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등극
▣1980
1980. 9. 19=서울 소신학교 폐쇄
1981. 9. 9=조선교구 설정 1백50주년 기념행사
1982. 3. 8=대구 선목신학대학 개교
1982. 10.12=주교회의 추계총회, 대림 제3주일을「인권주일」로 설정
1983. 1. 23=새 교회법 공표, 발효
1984. 5. 3=한국 순교 복자 103위 성인품에 올라 :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한국 천주교 2백주년 기념행사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방한
1984. 6. 25=최초 한국인 주교, 노기남 대주교 선종
1987. 3. 10=주교단 교계제도 설정 25주년 기념 담화문 발표
1989. 10. 4~8=제44차 세계 서울 성체대회 개회 :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1989. 11. 11=교황, 한국에 군종교구 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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