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선조들의 숭고한 신앙과 얼을 되새기는 순교자성월이다. 올해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비롯 103위 성인이 탄생한 지 10주년을 맞는 해여서 순교자성월의 의미가 더욱 고양된다 하겠다. 한국 교회는 무수한 순교자와 증거자의 피와 땀에 의하여 그 역사가 형성돼왔고 이들의 피와 땀과 밑거름이 조선교구의 발전을 이뤘다.
그 신앙의 겨자씨들은 이제 선교 3세기를 맞는 시점에서 3백만여 명의 거목으로 자라났다. 2천년대 복음화를 바라보고 있는 우리 신자들은 이러한 순교성인들의 신앙과 피와 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새롭게 봐야 할 것인가. 이에 시성 10주년과 순교자성월 특집으로 △초대 한국 교회의 여성 순교자들 △잊혀져가는 성지 △성인들의 축일과 관련한 기획을 3회에 걸쳐 마련한다.
한국 초기 교회의 발달과정에서 여성 신자들의 특징적인 역할을 살펴본다면 우선 유교적인 여성관으로부터의 탈피를 시도했다는 점이다.
조선 후기 천주교가 이 땅에서 공동체를 형성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을 동정으로 성화하고 복음 선포를 위해 하느님 일에 헌신적으로 뛰어든 수많은 동정녀들이 생겨났다. 이러한 동정녀들의 출현은 남존여비의 개념에서 발생한 성리학적「여필종부」의 억압적이고 제도적인 수정관(守貞觀)과는 분명히 다른 것으로 남녀가 반드시 혼인을 해야 하고 부녀자 모두는 가부장적 가족생활과 후손을 낳고 기르는 데 힘 쓰면서 효의 도리를 다해야 했던 성리학적인 기본 질서를 완전히 거부한 것이었다.
이 생활은 당시 사회 일반으로부터 뿐 아니라 가장 가까운 가족들로부터도 질시와 핍박을 받아가면서 신앙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나선 것이었다. 기존에 누리고 있던 신분적 특권과 앞으로 향유할 수 있는 사회적 지위를 온전히 버렸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경제적으로는 삯바느질이나 잔신부름 등으로 겨우 생계를 꾸려갔고 친지에게 의탁하여 근근이 연명해가는 등 물질적으로 대단히 가난한 경우가 많았다. 반면 이들은 그러한 세속적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고통 속에서도 영원한 삶의 천상적 가치를 추구한 자주성을 가진 여성들이자 신앙인이었다.
지배층의 박해를 모면하기 위해 스스로 자신을「과부」라고 하든가 또는「누구의 아내」라고 위장을 해야 했던 동정녀들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양반 출신 윤점혜(아가다) 중인 문양인(비비안나)을 들 수 있다.
동정생활을 선호하였던 것과 함께 초기 교회 여성들의 또 하나의 특징은 전교와 신앙활동을 위해 뜻을 같이하는 여성 신자들끼리 공동체를 형성하여 생활하였다는 점이다.
이같은 공동체 형성은 동정녀들의 출현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데 그 원인은 사회윤리적 경제적 윤리적인 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사회윤리적인 면에서는 가문의 존속과 유지를 무엇보다도 중시했던 유교적 사회체제 안에서 동정 봉헌을 하고 독신으로 생활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으며 경제적인 면에서 볼 때도 당시 혼전 여성의 경우 혼자 자립할 수 있는 사회적인 여건이 전무한 실정이었다. 이러한 현실은 서로 도우며 살면서 신앙을 실천하는 방편으로 공동체를 구성하게 했다. 또한 공동체의 형성은 종교적인 면에서 수녀원에 준하는 형태로 교회의 교세 확장과 체계적인 교회 창립 과정에서 필연적인 과정이었다고 얘기할 수 있다.
공동체 생활을 하며 크리스찬 이념을 바탕으로 가난 정결 순명에 자신을 성화하고 교회를 쇄신하는 데 열정을 바쳤던 동정녀들은 개인적 차원에서 물질적 가난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일상적 노동을 통해 이를 극복하고 사회적 고립과 정신적 폐쇄를 지양, 격의없는 친교를 나누었다.
대표적인 동정녀들의 공동체는 충훈부 후동(또는 안국동, 주문모 신부가 기거했던 한국 천주교 최초의 본당 자리)의 강완숙가와 벽동의 윤점혜가 군기사 앞의 김경애가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기도생활과 함께 모여서 학습하고 이를 실천함은 물론 활발하게 전교함으로써 지하에 흐르는 샘처럼 생명의 빛을 전하는 데 공헌했다.
강완숙가의 경우에는 주문모 신부가 기거하면서 전례의식 성사집행 교리학습 강론 등 제반활동을 수행, 교회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었고 강완숙 또한 교회 지도급 인사로서 왕가 과부 동정녀 하녀에 이르기까지 많은 부녀자들에게 하느님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각지에서 몰려든 과부나 동정녀들이 미사와 교리학습에 참석하여 이러한 의식이나 행사에 필요한 여러 가지 준비를 착실히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윤점혜는 윤유일의 사촌 누이로서 어릴 때부터 교리를 배워 강완숙과 함께 처녀들을 가르치는 데 전념했는데 주문모 신부는 강완숙 등을 비롯한 부녀자들의 힘을 빌어 천주교 전파를 계획한 것으로 알려질 만큼 이들의 역할은 큰 비중을 차지했다.
또한 이들의 전교활동은 뛰어났다. 기복적인 기도나 개인 구원 성화에만 머무르지 않았고 교리를 가르치고 도처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알려주고 그들을 교회로 인도하여 신앙 공동체의 일원으로 성장시키는 데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교회 내에 필요한 서적을 등사하거나 언문으로 번역하였고 성물을 제작하여 판매함으로써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북돋아주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강습소 등을 건립하기 위한 모금운동에도 참여했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과 대화를 함께 나누는 데에도 힘썼다.
이들의 활동과정에서 또 하나 특이할 만한 사실은 당시의 억압된 사회구조 속에서 여염집 부인들과 함께 남자 교우들과도 비교적 자유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필요한 만큼의 교제를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상당히 진보적인 것으로 당시 위정자들에게는 놀람과 충격으로 받아들여졌고 위정자들은 이것을 두고『사교에서는 음란을 일삼아 부부지륜이 어지러워졌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교회사가들은 이런 점에서 초기 교회 당시 동정녀들의 활동은 당시의 엄격한 남존여비의 억압적인 사회제도에 항의하는「여성해방」운동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이상에서와 같이 동정녀들을 비롯한 초기 한국 교회 여교우들의 신앙과 활동은 103위 성인 중 47위가 여성이라는 사실이 입증해주듯 신앙 안에서 자주적인 판단 하에 하느님을 위한 동정의 삶을 선택하거나 공동체를 형성할 만큼 적극적으로 하느님 나라 건설에 앞장 섰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남존여비 사상이 철칙으로 여겨지고 상반의 구별이 엄격했던 폐쇄적 봉건사회에서 귀천을 초월한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자기 양심에 충실했다는 것은 신앙의 자유를 구가하고 있는 현시대의 우리 신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또한 그들은 비단 신앙을 증거했을 뿐 아니라 남자와 동등한 자유로운 인격체로서 여성의 존재를 입증시킨 해방적인 여성들이었다. 대부분의 여성들이 가정에서만 생활하였고 모든 행동을 제약받아야 했던 조선시대에 있어 선교를 위하여 가정을 벗어나 사회에까지 활동 범위를 넓힌 이들의 활동은 천주교 여성사인 동시에 한국 여성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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