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활동과 원주민 노예문제
그리스도교가 지중해 연안의 로마제국에 전파되기 전에 로마제국에서도 노예 신분이 당연한 사회적 제도로 정착되어 있었다. 로마법에서는「노예나 동물(Servus Vel Animal)」이라는 표현으로써 노예를 동물과 같은 처지로 취급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전파되면서「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모든 인간은 똑같은 품위를 지닌다」는 만민평등사상을 가르치며 실천했을 때 로마제국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는 갈리스도 1세 교황(St. Callistus, 217-222)처럼 노예 출신이 교황의 지위에 오르는 등 평등사상을 복음의 근본적인 가르침의 하나로 받아들이고 실천하였다(신학전망, 85호<1989, 6>참조).
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하기 이전에 포르투갈인들이 아프리카 흑인들을 유럽에 데려와 노예로 부리기 시작하면서 중세 이후 노예문제가 대두되었다. 그 후 아메리카 대륙의 무한한 자원을 개발하기 위하여 원주민들과 아프리카 흑인들을 노예로 혹사시켰다. 특히 1600년부터 1800년 사이에 1천만 명 이상의 아프리카 흑인들이 아메리카에 노예로 팔려왔는데 그들의 대부분은 영국 식민지로 수송되었다. 수송 도중에 굶주림과 노동과 병으로 많은 흑인들이 선상에서 사망하였다.
정복자들과 함께 들어온 선교사들은 원주민들의 노예화에 대하여 서로 상반된 사고방식을 가졌다. 일반적으로 원주민들을 직접 접촉하는 일선 선교사들은 원주민들을 옹호하며 노예제도 자체를 죄악으로 단죄하였고 식민주의자들과 가깝게 지내는 교직자들을 비롯하여 일부는 노예제도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상태였다.
어떤 신학자들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그들의 탓으로 또 사람들 사이에 으례히 있게 마련인 자연적인 불평등으로 이미 노예로 운명지워졌다는 신학적인 이론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511년 산 도민고(San Domingo)에서 도미니꼬 수도 회원인 안토니오 데 몬떼시노스(Antonio de Montesi-nos)신부는『여러분은 도대체 무슨 권리로 원주민들을 이렇게 참혹하고 잔인한 노예로 부리고 있습니까. 이와 같은 여러분의 상태에서는 터키인들이나 무어인들보다 여러분의 영혼을 구할 수 없습니다』라고 강론하며 그 죄악상을 고발하였다. 이는 전례가 없는 충격적인 내용으로써 식민주의 당국과 원주민들에게 심각한 논쟁을 야기시켰다. 관구장은 파문의 경고와 함께 노예문제에 대하여 더 이상 거론하지 않도록「거룩한 순명」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미 노예문제는 공공연하게 논쟁거리로 떠올라 원주민들은 자기네들의 권리의식을 자각하기 시작하였고 스페인에서는 양심의 문제로 제기되었다. 그러자 안토니오 데에스삐날 등 프란치스꼬회의 일부는 원주민들이 완전한 시민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노예 신분에서 적어도 3대는 지나야 한다는 해괴한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 수도자들, 군주들, 신학자들, 교황에 이르기까지 이 문제에 대하여 10여 년간 논쟁했으나「신중함을 위하여」결정을 철회하였다.
원주민들의 권리를 옹호했던 선교사들 가운데 이미 소개한 바 있는 바르똘로메오 데 라스까사스 신부가 유명하다. 원래는 그 자신이 식민주의자로서 자기 농장에서 원주민들을 착취하다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회개하여 원주민들의 권익보호와 구원을 위하여 일생을 봉헌하기로 결심하고 도미니꼬회의 수사신부가 되었다. 따라서 그는 원주민들의 참혹한 실상을 구체적으로 잘 알았으므로 이에 대한 그의 비판은 구체적인 사실에 의한 객관적인 고발이었다. 그의 활동에 동조하는 다른 도미니꼬 회원과 예수회 회원, 프란치스꼬 회원들도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1537년 5월 28일 바울로 3세 교황(1534∼1549)은『교회 밖에 있는 원주민들도 신앙을 받아들이고 구원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들의 자유는 박탈될 수 없고 그들의 재산을 탈취할 수도 없으며 그들을 노예로 삼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설교와 모범으로 그들이「생명」에로 초대되어야 한다』고 교서를 발표하면서 인종주의와 아메리카 원주민의 노예제도를 파문벌로 단죄하였다. 닷새 후에『원주민들과 다른 민족도 비록 그리스도교 신앙을 모르고 살더라도 합법작이고 자유롭게 자유를 누릴 수 있으며 자기 재산을 소유할 수 있다. 그들을 노예로 삼을 수 없으며 노예에 관한 모든 계약은 무효』라는 교서를 다시 발표했다.
그 후에도 삐오 5세 교황(1566∼1572)이 1568년에, 우르바노 8세 교황(1623∼1644)이 1639년(Commissum nobis)에 노예제도 금지 교서를 발표하였는데, 베네딕도 14세 교황(1740∼1758)이 1741년(Immensa pastorum)에도 교서를 발표하여 신분, 성, 조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인디언들」을 노예로 삼거나 이를 목적으로 그들의 고향에서 다른 먼 곳으로 수송하는 행위를 파문하도록 라틴 아메리카 주교들에게 명하였고, 역시 그레고리오 16세 교황(1831∼1846)도 1839년에 이와 비슷한 교서를 발표하였다.
위와 같이 교회에서는 공식적으로 원주민들의 권익 보호에 관심을 가졌지만 권력과 재물에 이해관계를 깊이 맺고 있는 식문주의자들과 이들이 제공하는 호의와 특권에 만족한 일부 선교사들은 교회의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지 않았다. 거의 비슷한 내용의 교서가 반복되어 발표되었다는 것은 교서의 내용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이 아닌가. 선교사들은 파견된 지역에서『억울하게 묶인 이를 끌러주고 멍에를 풀어주는 것, 압제 받는 이들을 석방하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버리는』(이사 58, 6) 일부터 시작하여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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