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하느님과 일치되어 있다는 말씀은 이미 여러번 유대아인들의 분노를 사서 그를 죽이려는 음모에 빌미를 주곤 하였다 (요한5, 17~18: 8, 58~59).
오늘도 예수께서 같은 이야기를 하셨다. 『내가 아버지께서 맡겨 주신 좋은 일들을 많이 했는데 그 중 어느 것이 못 마땅해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전에 베짜타 연못에서 38년동안의 반신불수병자를 고쳐 주셨을때 그 날이 안식일이라 해서 유대아인들과 논쟁을 벌일 때에 예수께서는 이미 이 말씀을 하셨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성취하라고 맡겨 주신 일인데…』. 요한은 오늘 이야기에서 「많은 일들」이라고 했는데 요한복음서에 기록된 일들은 실제로 6가지 정도이다. 그러나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기적들도 수없이 행하셨다』라고 결말에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요한이 많은 기적을 알고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 많은 일들을 좋은 또는 선한 일들이라고 한것은 하느님께로 부터 나온 일들이란 뜻이다. 여기서 유대아인들과 예수 사이는 논리상의 차이점이 있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다. 유대아인들은 율법상의 논리를 폈기 때문에 예수의 말씀이 (하느님과 하나이다) 신성모독이기 때문에 돌로 치려고 한것이고 예수께서는 신앙상의 논리로 예수의 좋은 일을 하느님이 맡기신 일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예수와 하느님은 일치를 이루고 있는 표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요한 5. 36~37) 『나는 세상의 빛이다.』 (요한 8, 12) 『나는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다.』(요한8, 58)이라고 할 때 유대아인들은 이미『이자가 자기를 신으로 자처하는구나』라는 의구심을 가지기 시작하였었다.
그리고 레위기에는『누구든지 하느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자는 죽여야 하고 회중이 돌로 쳐 죽여야 한다. (24, 16) 라고 한 말을 그들은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진작 어떠한 발언이 하느님의 이름을 모독하느냐는 문제는 그들의 율법해설서격인 미쉬나라는 책에는『하느님의 이름(Tetrammaton이라하여 히브리어로 하느님을 나타내는 네 글자 (JHVH 혹은 JHWH 또는 YHVH 혹은 YHWH) 를 입밖에 내지 않는다면 신성모독죄가 되지 않는다』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유대아인들은 예수를 죽이려는 결심을 굳히어 (요한5, 18) 그 죄목을 찾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께 사형죄목을 걸수 있는 사항은 율법에 의거해서 하느님의 이름을 모독했다는 죄목밖에 없었다. 그 죄목을 걸자니 뚜렷한 증거가 없었다. 그들이 발견한 죄목은 예수의 입에서『나는 메시아다』라는 말을 유도해 내는 것이었다.
그것은 로마점령군과 정치적으로 음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나는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고 있다』라는 말씀을 걸고 넘어 간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구실로 돌을 집어 들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유대아인들의 억지논법이 개재해 있다.
율법의 신성모독죄는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불렀을 때이다. 『당신이 한갓 사람이면서 당신을 하느님으로 만들고 있지 않소』 라고 그들은 논고를 폈지만 율법해설가인 라삐 압바후 (Abbahu, 300년)의 말대로 『어떤 사람이 나는 하느님이요라고 말한다면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고…나는 하늘로 올라 갈것이라고 말했다면 그는 그것을 실천에 옮기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예수가 만일 하느님이라고 말했다 해도 거짓말을 한 결과 밖에는 안된다.
예수께서는『나는 아버지와 하나이며…아버지께서 맡겨주신 좋은 일을 하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뿐이다. 물론 알아들을 귀가 있는 자 알아 들을 일이다.
하느님의 행세를 하거나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라고 하는 것은 하느님의 이름을 모독하지 말라는 율법서의 금령과는 법률적으로 다른 일이다. 예수도 시편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너희 율법서에는 하느님께서 너희를 신이라 불렀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라 불렀다』(시편82, 6) 라고 했는데 신이라 불리운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가리켰다. 그렇다면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라 했다 해서 무슨 죄가 되겠느냐 라는 논거를 폈다.
여기서 구약의 신이라 불린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판단하는 판관들을 가리켰다. 예수님이 아버지의 맡기신 일을 하고 그 말씀을 전한다고 하신 것은 이제 참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내 말을 귀담아 들으라는 뜻이었다.
사실 예수께서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라고 하신 기록은 복음서에서 찾아 불 수 없다. 여기서『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한 말 때문에』 라고 했지만 그것은 아마도 예수께서 전교생활을 시작할 때 더러운 악령들이 예수를 보고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라고 불렀을 때 부인하지 않으신 것을 (마르3, 1: 5, 7) 가리킬 것이다. 예수께서 그 말씀을 직접하셨다 해도 율법을 어긴 것은 아니었다.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했다 해서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하느냐?』. 실은 그들과의 대화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암시하고 있다.
하느님의 일을 맡아 하고 있다는 것은 예수를 신적인 존재로 믿어야 한다는 논조이다. 그리고 나라는 사람이 싫더라도 내가 행하는 하느님의 일은 믿어야 할 것이 아니냐는 논거에서 일을 믿으면 일을 하는 사람이 하느님과 일치되어 있음을 믿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의 토론의 내용은 요한이 복음서 초두에서 예수를「하느님의 말씀」으로 제시했고 그 말씀이 복음으로 전파되는 것이 예수에게서 이뤄진다는 사실을 초대교회에서 가르치며 이 직무는 사제직을 행하는 예수로 부각시키려는 교리이다.
이에 유대아인들은 또 다시 예수를 붙잡으려 했고 예수께서는 몸을 피하여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요르단강으로 가셨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과 예수를 비교하며 예수의 기적을 믿은 사람이 많이 생겼다. 이것은 사도교회의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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