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과천의 한 아파트 단지에 사는 양구열(베네딕도ㆍ49ㆍ과천본당)씨 가족의 일과는 이른 아침 아파트 근처 공터에 마련된 텃밭에서 시작된다.
해가 뜸과 동시에 삽과 호미 물조리를 제각각 들고 텃밭으로 향하는 이들의 발걸음은 밤새 호박이 얼마 만큼 자랐는지, 고추는 병없이 잘 익어가고 있는지, 가뭄에 미처 물기가 닿지 않아 시든 것은 없는지, 오늘은 무엇을 따라 밥상에 올릴까 등등의 기대와 풍요로 가득 차 있다.
10년 넘게 약 20평 남짓 되는 텃밭을 일구며 제철에 나는 채소 정도는 자급자족하고 이웃과 나눔을 갖고 있는 양규열씨네는 어느덧 이웃으로부터「농사꾼」이란 별명을 얻게 됐다.
공해에 찌든 요즘 옥상이나 베란다에 화분을 놓고 화초나 채소를 키우는 사람들이 많지만 양규열씨 가족이 이렇듯 오랫동안 텃밭을 일궈오는 데는 남다른 철학과 신앙이 배어 있다. 양규열씨와 부인 김난희(아녜스ㆍ44)씨는 79년에 세례를 받았는데 이때부터 하루하루의 삶을 어떻게 봉헌해야 하는가를 깊이 생각한 결과「의식주에서 구체적인 청빈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부인 김난희씨는『자발적인 가난은 이웃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며 세상의 가난에 대하여 함께 대처하는 연대행위』라고 자부하면서『단촐하고 소박하게 살아가기로 마음 먹었다』고 말했다. 이러한 생각 때문에 가공식품이나 청량음료 일체 안 먹기, 인스턴트 식품 안 먹기, 비닐하우스 채소와 양식 해산물, 양계란 등을 되도록이면 덜 먹기를 실천하는 가운데 자연텃밭은 없어서는 안 될 건강한 먹거리의 공급원이 되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을 통해서 얻은 것들은 너무도 많다고 양규열씨 부부는 말한다.
우선 공부에 주눅든 딸 소영(벨베뚜아ㆍ14) 아들 시현(안드레아ㆍ13) 시찬(사도요한ㆍ9)이에게 피아노와 속셈학원의 가방 대신 잠자리채를 쥐어줘 자연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텃밭에서 자라는 식물들과의 교감을 통해 심성을 닦아가는 산교육장을 제공할 수 있었다.
『텃밭 일구기를 통해 얻은 것들 중에 가장 큰 것은 무엇보다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재발견과 그 무한한 사랑의 힘에 대한 경외에 있다』고 말하는 양규열씨는 단 하루라도 신경을 써주지 않으면 금세 무성해지는 잡초들을 보면서 또 고추와 호박이 열리고 옥수수알이 굵어지는 모습에서 하느님의 신비를 체험한다고 말한다.
아이들과 함께 매일 아침 한 시간씩 텃밭에서 땀 흘리며 일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고귀한 것인지 새삼 느낀다는 양규열씨 가정은 아이들도 그 귀중함을 알아서인지 음식을 함부로 버리거나 남기는 버릇이 완전히 없어졌으며 아이들 손으로 직접 수확한 채소로 식탁을 차리면 더없이 풍요롭고 먹는 일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고 한다.
특히 요즘처럼 가공식품이나 인스턴트 식품들이 마구 쏟아져나와 아이들 입맛을 서구화시키고 간편한 음식만을 선호하게 하는 세태에도 양규열씨 가정은 식탁 만큼은 무공해 자연식품과 직접 만든 떡 죽 산적 미숫가루 등이 오르기에 자연히 아이들도 햄버거나 피자보다 엄마가 손수 만든 우리 음식을 좋아한다고.
『밭이 넓기 때문에 우리 다섯 식구 먹기에는 좀 많아요. 그래서 이웃들과 나누어 먹지요』라고 말하는 김난희씨의 말에서 이미 이웃들과도 친근한 관계 속에 살고 있는 따뜻함을 엿볼 수 있다.
양규열씨네는 한겨울을 제외하고는 늘 현관문을 열어놓고 지낼 정도이고 본당 신자는 물론, 이웃 아주머니나 아이들의 친구들도 때를 가리지 않고 내 집처럼 드나든다. 이렇게 지내다 보니 함께 기도도 하게 되고 사는 이야기도 나누는 가운데 행복한 가정의 참 모습을 보여주고 핵가족시대를 살아가는 도시인들에게는 더없이 편안한 공간이 돼 동네 사랑방, 나아가 선교의 장이 되기도 한다.
6년째 레지오 주회에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는 양규열씨의 모범된 신앙생활과 결혼한 지 20년이 다 되도록 부부싸움 한 번 못해 봤다는 웃음과 신뢰 가득한 부모를 볼 때 이들 세 자녀의 신앙 또한 자연스레 열심일 수밖에 없어 보인다.
『매사에 하느님을 느끼며 늘 감사하는 자세로 겸허히 살고 있다』는 양규열씨 가족에게서는 항상「무공해」 냄사가 은은히 전해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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