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에서 대부분의 상품들은 진열장 속에 갇혀 있다. 개인들이 모여 시장을 이루는 자유시장을 제외하면 고객이 상품을 손으로 만져보기까지는 많은 인내와 불편이 뒤따른다. 물론 이 인내와 불편이 러시아와 처음 대면하는 관광객일수록 그 농도가 심할 수밖에 없다. 러시아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작은 상자와 같은 상점들이나 국영백화점에 이르기까지 상품이 조금만 많다고 생각되면 그 상품들은 영락없이 진열장 속에서 얼굴만 빠끔히 내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저기 널려있는 상품 사이로 마음대로 비집고 다니며 이것저것 만져보고 걸쳐보는 등 여유 있는 쇼핑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에게 사방 20cm가 겨우 넘을 듯한 조그만 창구 앞에 얼굴을 대고 필요한 것만을 요구해야 하는 이상한 쇼핑은 영 마음에 들지가 않았다.
백화점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입어보고 선택을 해야 하는 옷가게 앞에는 별도의 문지기 아주머니가 예리한 눈을 반짝이며 인원을 통제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의 눈으로 확인할 수가 있는 인원만을 정확히 제한하며 가게 안으로 고객을 입장시키고 있었다. 쇼핑하는 일이 마치 수준 높은 예술품을 감상하는 기회라도 되는듯 고객들은 얌전히 가게로의 입장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진열장에 갇힌 상품
어디 그뿐인가. 여름이건 겨울이건 시원한 음료수만 찾던 우리의 습관은 따뜻한 맥주나 미지근한 콜라 앞에서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목이 자주 마를 수밖에 없는 여행객들의 경우 찬 음료수를 손쉽게 구할 수가 없다는 사실은 치명적 장애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한여름인데 왜 시원한 맥주가 없는가 묻는 기자에게 그녀는「높은 치」들에게 물어보라고 담담히 말했다.
모스코비치들이 이야기 끝에 자주 달고 나오는 높은 치들이란 당 고위 간부를 의미하고 있었다. 냉소적으로 들리는 이 말은 러시아의 현실을 목격하면 곧바로 이해가 되기도 한다.
높은 치들에 대한 그들의 감정은『어떻게 하면 인민들을 불편하게 만들까 하는 연구로 세월을 보낸 사람들이 곧 높은 치』라는 표현 속에 그대로 담겨 있었다. 인간의 행복을 물질적인 것으로만 한정한다면 그 높은 치들은 구 소련 인민들의 행복을 앗아간 사람들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았다.
◆백 속의「일용할 양식」
큼지막한 가방 하나씩을 옆구리에 차고 목적지를 향해 부지런히 걸어가는 러시아인들. 그들에게 있어 가장 가까운 행복은 아마도 그 가방 속 하나 가득 일용할 양식을 채우는 일인 것 같았다.
신사 숙녀 가릴 것 없이 마치 똑같은 그림처럼 들고 다니는 큰 가방은 러시아에선 무조건「보면 사라」던 안내자 마리아씨의 충고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기도 했다.
현재 러시아가 직면한 고민은 시대적 상황이 만들어낸 경제적 궁핍을 하루 아침에 극복하고자 하는 위험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에 갓 도착한 우리를 기다린 첫번째 뉴스도 이들이 매일처럼 벌이고 있는 강도 행각에 대한 경고였다.
한국인들은 이들이 노리는 가장 좋은 고객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상황이 우리가 도착하기 바로 하루 전에 터졌다는 사실이 우리를 참으로 슬프게 했다.
◆차량 부품 분리 보관
음악 공부를 위해 모스크바로 유학 온 딸도 만날 겸 친구들과 더불어 러시아에 왔던 한국인 중년 부인 3명이 모스크바 강도들로부터 가진 것을 몽땅 털렸다는 것이었다.
아파트 문을 뜯고 들어온 강도들은 이들이 입고 있던 옷가지까지 싹쓸이를 해버렸고 이 소문은 그동안 빈번하게 당해온 러시아 거주 한국인들과 여행객까지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카 스테레오」 「윈도 브러시」등 자동차 부속품은 출퇴근과 더불어 자동차로부터 분리 보관해야 하는 러시아의 오늘은 불과 수십 년 전 빨래줄에 걸린 입던 헌 옷가지나 낡아빠진 가죽구두조차 밤새 사라져 버리곤 했던 우리의 지난날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배가 고파도 당시 우리는 남의 집 대문을 아예 뜯어내고 팬티만 남긴 채 몽땅 털어가지는 않았다고 들었는데….
닫혔던 문이 열리면서 잘 사는 외국인들이 선망의 대상이 되다 못해 그들과 빨리 같아지고 싶은 욕심으로 파생되기 시작한 이 문제는 현재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는 러시아 실정으로선 손을 쓸 수가 없다고 했다.
아무런 위반없이 정상적으로 운행하던 자가용도 경찰이 세우면 서야 하고 그가 벌금을 물리면 꼼짝없이 물어야 하는 것이 러시아의 오늘이기 때문이었다. 왜 그래야 하는가 하는 물음에 모스코비치들은「엿장수 마음대로」라는 정답을 들려주었다.
◆문화유산 곳곳 산재
환전을 위해 내미는 달러가 조금만 헐었어도 아무 말 없이 되돌려주는 러시아의 현실 그 현장에서 바라다보면 과연 이들에게 아름다움과 예술을 생각하는 마음이 남아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건 기우에 불과했다. 비록 일용할 양식은 진열장 속에 갇혀있을망정 예술을 사랑하고 문화를 보전하는 러시아인들의 지극히 높은 감각은 러시아 곳곳에서 목격할 수가 있었다.
눈만 돌리면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에서나 산재한 유물과 유산을 마음대로 볼 수가 있는 곳, 그곳이 바로 러시아였다. 피의 혁명에 이어 오랜 사회주의 체제하에서도 이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남긴 엄청난 유물을 너무나도 잘 간직하고 있었다.
가난이 넘쳐흐르고 불편이 곳곳에서 생활을 괴롭히는 현장, 그 러시아에서 어떻게 그 많은 문화적 유산을 보전할 수가 있었을까. 지하철 역 안팎이면 어디서나 자리하고 있는 꽃집에서 모가지가 기다란 장미꽃 한 송이를 사들고 흐뭇해 하는 러시아인.『한 끼 밥은 굶을지언정 꽃을 산다』는 러시아인들, 그 정감 나는 이야기가 우리의 이해를 정확하게 도와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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