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변의 시대, 그 중심에서 러시아는 오늘도 불안한 모습으로 서 있다. 70여 년 동안 소련제 철제 빗장으로 대문을 걸어 잠근 채 철저히 침묵해온 이 광활한 대지는 이제 그 침묵의 세월 만큼이나 깊은 충격을 온몸으로 맞고 있다. 더 이상 나빠질 수 없을 만큼 최악의 상태를 맞고 있다는 러시아의 정치 경제 사회, 아니 모든 것, 이 새로운 도전 앞에 러시아는「과거로의 회귀」라는 강력한 유혹과 직면하고 있다.
과거의 전통, 변화와 새로움이 맞부딛치는 격변의 현장을 가보았다. 서울대교구 사회복지회 회장 이원규 신부, 송옥자 선생, 중대 부속병원 정문옥 선생과 함께 한 이번 취재는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와 자존심의 도시 레닌그라드, 러시아의 대표적 두 도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러시아를 알려고 하지 말라. 러시아에선 보면 사고 있으면 먹어라. 그리고 줄 때 받아라』
러시아 체재 기간 중 우리를 안내한 고려인, 권 마리아씨는 우리와의 첫 대면에서『러시아를 머리로 이해하지 말 것』을 여러 번 충고했다. 이 충고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아니 우리는 이미 러시아 입국에서부터 러시아에 대한「이성적 수용」을 포기했었다.
저녁 7시(현지시간) 모스크바에 도착한 일행이 숙소에 짐을 푼 시간이 밤 10시 30분. 모스크바「세례메티예보」공항에서 입국을 위해 보낸 시간이 물경 3시간에 가까웠다는 얘기가 된다. 입국장을 가득 메우고도 넘치는 사람들의 지치고 지친 표정에도 입국관리소 직원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입국 수속 3시간 소요
계속 쏟아지는 승객을 위해 그들이 열어놓은 입국 심사와 세관 검사대라곤 오직 3곳. 꼬리를 물고 있는 입국자들의 짐을 샅샅이 조사하는 그들에겐 표정이라곤 전혀 없는 듯했다. 러시아 체재 내내 우리는 이 무표정의 집단과 대면해야만 했다. 참으로 이상한 경험이었다.
물건을 파는 쪽에는 으레 먼저 말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되어온『감사합니다』. 세계적 언어로 자리한 생큐를 러시아 내 국영상점에서는 한 번도 먼저 들어본 기억이 없다. 한결같은 무표정, 아니 오히려 귀찮기만 한듯 그들의 모습에서 신음하는 러시아 경제, 그 뿌리가 손에 잡히는 듯했다.
지하철 역 근처 등에서 잠깐씩 섰다가 파하는 이른바 자유시장에서도 생큐라는 말을 찾기는 어려웠지만 국영백화점과 분명히 다른 점이 있었다. 그건 활기였다. 감사의 표시가 활기였다. 감사의 표시가 필요없는 사회 속에서 오랫동안 고착되어온 무표정의 저 너머로 일한 만큼 내 것을 챙기는 작은 기쁨의 큰 조각들을 확실히 감지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생큐를 모르는 사람들
빵도 과일도 야채조차도 언제 어디서 손 쉽게 구할 수 있는지 안내가 없이는 찾을 수 없는 나라, 러시아. 이방인들에겐 그래서 더욱 힘겹기만 한 러시아를 러시아인들은 어떻게 진단하고 있는가.
『신이 이렇게는 살지 말라고,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러시아를 만들었다』. 이것이 러시아에서도 콧대 높기로 유명한 모스크바인-모스코비치들이 스스럼없이 내뱉는 자기 비하의 유머다. 이 말은 오늘의 러시아의 경제적 상황에 대한 가장 적절한 표현이라는 사실에 우리는 아무런 의의를 달 수가 없었다.
◆식사 배설마저 통제
모스코비치들이 자기 현실에 대해 비웃는 표현은 이 밖에도 참으로 많았다.『물은 있는데 수도꼭지가 없어서 씻지 못하는 나라. 전기는 있는데 전구가 없어서 어두운 나라. 결국 하드웨어는 있는데 소프트웨어가 없는 나라가 곧 러시아』라는 등등이 바로 그것이다. 단 하루만 러시아에 살아본다면 이 같은 표현을 선택한 뛰어난 감각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원하면 살 수가 있고 가고 싶으면 갈 수가 있는 편리한 세상살이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에게 러시아는 참으로 불편한 나라였기 때문이었다. 그 불편은 화장실 찾기에서부터 쉽게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국영백화점 내에서조차 화장실이 없는 것에 화를 내는 내게 안내자는 먹을 것과 배설을 통제하는 것이 사회주의 국가의 정석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화장실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나와 그녀의 명백한 차이점은「수용」과「불수용」이었다. 그녀와 그녀의 친구 모스코비치들은 우리의 불편을 오히려 이해하기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 막강한 군사력을 앞세워 수십 년간을 인민들 위에서 군림해온 나라, 엄청난 위력을 이웃나라에까지 떨치며 인민들의 생사여탈을 한 손에 쥐고 흔들었던 나라, 그 러시아에서 인내로 살아남았던 사람들. 그러나 무한할 것만 같았던 그 인내도 개혁과 개방의 물줄기 앞에 한계에 다달았다는 것이 그들 자신의 진단이었다.
내일을 정확하게 바라볼 수 없는 러시아의 현실은 곧잘 날씨와도 비유가 된다. 청아하게 맑은 아침을 바라보며 우산을 준비하지 않았다면 그 날은 꼼짝없이 비를 맞아야 하는 것이 곧 러시아, 모스크바의 날씨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씨를 보며 맑음을 예고하면 하늘은 영락없이 천둥과 함께 비를 뿌리고, 짙게 깔린 구름만 보고 비를 예고했다간 갑자기 청자빛 하늘이 사람을 놀리는곳 그것이 러시아 모스크바의 기본 날씨라 생각하면 틀림이 없다.
◆기약할 수 없는 내일
그래서 러시아의 일기예보는 항상 같은 내용일 수밖에 없다는 우스갯 소리를 하기도 한다.「맑음, 흐림, 그리고 비」. 현재 러시아는 자신의 날씨와 같은 운명에 처해 있는지도 모른다. 오랜 세월 동안 굳어져온 습관을 고치기 힘든 것처럼 변화하는 러시아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굳어져온 관행과 습관을 고치는 것이라 생각된다. 물론 그것은 러시아에 있어 무엇보다도 힘들고 어려운 숙제일 것이다.
개혁과 개방이라는 도전을 정면으로 받고 있는 러시아에 있어 이 고질병을 고칠 수만 있다면 러시아의 내일은 분명, 언제나 맑음으로 전망될 수가 있을지도 모른다.
개혁과 개방의 이름으로 치르고 있는 러시아의 고통을 보다 가깝게 맛 보았던 이번 취재는 러시아의 정치 경제 사회 등 암울하기만 한 현실을 중심으로 고난의 시간을 기도로 지탱해온 러시아 정교회의 어제와 오늘, 질긴 생명력으로 살아남은 러시아의 고려인을 심도 있게 살펴보았다. 아울러 피의 혁명 중에도 찬란한 문화예술을 보존해온 러시아의 두 얼굴을 비롯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겉돌고 있는 러시아 가톨릭교회의 현주소를 함께 찾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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