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주의 정책의 배경
하나의 역사적인 사실을 평가할 때 결과적으로 드러난 현상 자체만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역사의 진실을 왜곡하거나 과장하기 쉬운 함정에 빠지기 쉽다. 역사는 결과를 최우선적인 기준으로 삼는 산술적인 통계가 아니라 결과 못지 않게 그 결과에 이르게 된 과정을 탐구하여 역사적인 의미와 가치를 평가하는 균형 있는 조화를 중요시한다.
정복자들이 그들의 점령지에 그들의 기준으로 보아 우월하다는 유럽문화를 이식하고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였다는 그 결과만으로, 그 결과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저지른 비그리스도교적이고 비인간적인 잔인한 만행을 합리화시킬 수는 없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이 저지런 만행이 분명히 하나의 죄악이지만, 소위 라틴 아메리카 문화 형성에 그들이 긍정적으로 기여한 부분도 있다는 것도 인정되어야 할 것이며 이러한 관점에서 그들의 식민주의 정책을 평가해야 할 것이다.
유럽 정복주의자들의 식민주의 정책은 정복자들의 출신 성분과 파견 국가의 국력, 그리고 정복 대상지역의 정치적인 안정과 군사력에 따라 그 양상과 침략 강도가 다르게 드러났다.
아시아에 첫 발을 들여놓은 포르투갈인들은 아시아 내륙 깊숙이 침투할 시도를 하지 않았는데 이는 내륙 깊숙히 정복할 그들의 힘이 부족하였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정복 대상지역의 중앙집권적인 강력한 군사력과 문화적인 수준과도 관계가 있다고 본다. 아시아지역에서 포르투갈인들은 정복자로서의 모습보다는 무역상인으로서의 역할에 더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내륙의 물자들을 수송하는 데 전략적으로 유리한 해안지역을 교역 거점으로 확보하고 해상교통을 이용하여 내륙의 물자들을 본국으로 수송하였다. 그들의 무역은 본국의 엄격한 독점체제에서 입찰제로 실시되었는데 그들은 인도, 말레지아, 중국뿐만 아니라 일본에까지 진출하여 교역하면서 그들에게 서양 문물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한편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인들이 완전한 정복자로서 식민주의 정책을 실시하였다. 스페인 원정대들은 해변지역에 머무르지 않고 아메리카 내륙 깊숙히 침입하여 거대한 대륙에 흩어져 있는 금, 은, 진주 등 값비싼 보석들을 탈취하고 광산을 개발하여 많은 물자들을 본국으로 수송하였다.
예를 들면 1520년부터 1660년까지의 공식적인 통계만으로도 스페인에 수송된 금이 약 2백t, 은이 약 1천8백t이었으며 여기에 비공식적으로 흘러들어온 양까지 보태면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그리고 첫 정복자들과 그 후대의 식민지의 지배자들은 유럽 대륙의 교육과 관습을 점령지에 이식하였을 뿐만 아니라 원주민들과 유럽인들의 요소를 융합하여 소위「라틴 아메리카」문화를 형성하게 하였다. 물론 문화적인 새로운 융합의 이면에는 원주민들이 당한 상상을 초월하는 잔혹한 고통과 피의 희생이 수반되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정복자들은 멕시코의 아즈테크(Az-tecs)와 페루의 잉카(Inca) 문명 등 원주민들의 고대 문명을 전혀 존중하지 않았다.
그들은 원주민의 종교에서 실시한 인육제사나 일부다처제를 강제로 철폐시켰다. 다소 과장되었겠지만 멕시코에서는 1년에 1천여 명이 원주민의 종교의식에서 제물로 희생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비인간적인 관습들이 제거된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북아메리카를 정복한 앵글로 색슨인들의 식민주의 정책은 훨씬 가혹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들은 인종편견주의적인 시각에서 점령지의 원주민 부족들을 조직적으로 말살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앵글로 색슨 정복자들이 식민주의 지배지를 확장하려는 정치적인 동기와 단기간에 많은 부를 축적하려는 상업적인 동기로 가족 전체가 함께 이주하였다는 사실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후 영국 성공회의 종교적인 박해를 피해 칼빈파 교도들이 이주하여 종교적인 분위기에 있어서 북아메리카는 다른 양상을 보였다.
위와는 달리 초기 스페인, 포르투갈 정복자들은 가족 단위가 아니라 국가의 관리요 군인이요 상인으로서 그들의 부모와 가족들을 남겨두고 수만리 떨어진 이역 땅에서 외로운 생활을 해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자연히 원주민 여인들과 동거생활을 하면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원주민들의 생활방식에 어느 정도 접촉하게 되었다.
인종적인 편견과 사회적인 선입견으로 길지는 않았지만, 어느 기간까지는 식민주의자들의 일부가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메리칸 인디안(Amerindios) 여인들과 결혼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후 본국의 여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해오면서 이러한 경우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위와 같은 상황을 염두에 두고 새로운 선교지역에서 식민주의 정책과 선교활동과의 관계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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