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적 배경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과도기에서 유럽의 각국은 민족주의적인 국가의 세력 확장과 경제적인 필요에 따라, 즉 신흥 군주국가들의 영토 확장과 자원자들을 위해서 새로운 통상로를 개척하는 데 몰두하였는데 그 결과 유럽의 여러 나라는 해외에 식민지를 두어 자국의 영토로 삼았다. 동기야 어떻든 그리스도교 국가에서 추진된 해외 영토 확장을 위한 식민주의 정책에 선교 과업이 수반된 것은 교회의 선교 사명 자체로도 필수적이었지만 동시에 그리스도교 신자인 군주로서도 당연한 과업으로 받아들였다.
예를 들면, 콜럼버스가 항해를 출발하기 전날인 1492년 4월 30일 스페인 왕은「하느님과 우리에게 봉사하는 데 아주 유익한 것을 위하여 대양으로 나가도록」요구하였다. 그리고 마르띠노 5세 교황(1417~1431)과 니꼴라오 5세 교황(1447~1455)이 1430년과 1454년에 이미 포르투갈인들이 탐험한 아프리카지역에 대해서 포르투갈 왕에게 그 지역의 지배권을 인정한 바 있다.
일부 역사책에 이른바 아메리카「신대륙」발견이라는 용어를 쓰기도 하였는데 이는 유럽의 우월주의의 시각에서 사용한 용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유럽에 나라가 생기기 훨씬 이전에도 아메리카 대륙은 이미 있었고 유럽 사람들이 들어오기 이전에도 그곳의 원주민들이 이미 자기들의 나라를 세우고 자기들의 고유한 문화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아메리카」란 이름은 이탈리아의 아메리카(Ame-rigo Vespucci. 1451~1512)가 그의 편지에서 이 땅을「신대륙」으로 발표한 데서 유래하였다.
14, 15세기에 지리학의 발달로 항해 기술이 촉진되어 먼 곳에까지 항해하는 탐험을 감행하였다. 1460년경까지 바르톨로메오 디아즈(Bartho-lomeo Diaz, 1450~1500), 바스꼬 다 가마(Vasco Da Gama, 1469~1524) 등 포르투갈인들은 아프리카 서쪽 중간의 카메룬까지 항해한 적이 있었는데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탐험을 계속 시도하여 1488년에는 아프리카의 남쪽 끝까지 도달하였다.
그 이후에도 계속하여 인도, 중국, 일본, 오늘의 브라질 등 남아메리카까지 항해하여 무역 거점을 확보하였는데, 1516년 중국에 도착한 그들은 정복자로서가 아니라 무역 상인으로서 협력을 요구하였다. 1567년에는 중국 당국의 허가를 받아 마카오를 동양의 무역 거점으로 삼았고 1542~1543년에는 일본에까지 항해하여 서양의 문물을 전수하였다.
스페인도 이사벨라 여왕의 후원으로 이탈리아 사람 콜럼버스(Cristoforo Colo-mbo, 1446~1506)를 선두로 하여 대양 항해를 시작하였다. 콜럼부스는 1492년 중국을 향해 서쪽으로 항해하여 여러 섬들이 모여 있는 현재의 중앙아메리카에 도착하여 산 살바도르(San Salvador)라고 이름 지은 한 섬에 상륙했는데, 그는 그 지역을 인도의 서쪽으로 착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그곳을 서인도로 이름 짓고 그 이후에도 3회에 걸쳐 더 항해하였지만, 그는 끝까지 그곳을 아시아로 확신하였다.
콜럼버스 이후에도 멕시코, 칠레, 아르헨티나, 페루 등 남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하여 그곳을 정복하여 식민지로 삼고 원주민들의 많은 재물을 무력으로 탈취하여 본국으로 가져갔다.
포르투갈과 스페인, 이 두 나라가 해외 식민지 영토 확장이 더욱 가열되어 상황이 심각해지자 알렉산데르 6세 교황(1492~1503)은 1493년 칙령으로 두 나라를 타협케 하여 그 이듬해에 또 르데실라스(Tordesi-llas) 조약을 맺게 하여 점령지의 경계선을 설정하였다.
교황은 칙령에서, 군주들은 탐험대를 보냄에 있어서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을 보내어 가톨릭 신앙으로 주민들을 가르치고 그들에게 좋은 습관을 기르도록 하는 의무를 상기시켰다.
영국왕 헨리 7세는 1497년부터 이탈리아 사람인 죤카보드(Giovanni Cabot)를 후원하여 캐나다 등 북아메리카를 탐험케 하여 그곳의 영유권을 주장하였고, 프랑스는 다른 나라들보다 훨씬 늦게 해외 탐험을 시작하여 캐나다의 일부 지역을 점유하면서 북아메리카 북동부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그 후에도 점유지를 계속 확장하면서 퀘벡(Quevec)까지 점령하였다.
원주민들을 무자비하게 정복한 유럽의 정복자들은 어떤 그리스도교 정신을 가졌을까?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의 하나인 선교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이들과 함께 점령지에 들어간 선교사들은 원주민들의 종교와 문화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졌을까? 선교사들은 식민주의자들의 만행을 종교의 이름으로 합리화시킨 그들의 앞잡이였을까? 근거없는 과장도 광신적인 호교적 태도로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