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늦게 잠을 잔 덕에 오늘 아침에는 늦잠을 자고 싶었다. 그래서 침낭 속으로 몸을 깊숙이 넣었다. 하지만 배낭족들이 모두 일어나 부지런을 떠는 바람에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갑판에서 자는 것도 서러운데 잠도 제대로 못자다니 가난이 죄로군…
의자에 앉아 있으려니 한 동양인 부부가 갑판을 산책하며 내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 부부가 나를 찬찬히 훑어보다가 조심스레『안녕하세요』하며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아랍어를 공부하는 한국인 부부였다. 모로코에서 살다가 지금은 요르단으로 이사를 가는 중이라고 했다. 그래서 아랍 국가와 적대관계인 이스라엘행 배에 승선할 때도 아주 골치였단다. 배가 늦게 출발한 것도 다 자기들 때문이라며 살짝 귀띔을 해주었다.
서울을 떠난 지 오래라서 잘 모르긴 했지만 그래도 그들보다는 최근에 떠나온 것이므로 내가 알고 있는 고국의 소식을 그들에게 전해주었다. 오랜만에 그 부부에게서 새벽 참으로 라면도 얻어먹고 맥주도 먹고 한국말로 대화하고… 잠시나마 배낭족의 외로움을 잊을 수 있었다.
뚜오모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우리를 쳐다보았다. 친구도 친척도 아니면서 어떻게 저리도 친하게 어울릴까 하면서 말이다. 겉으론 신사적이면서도 속으로는 이기적인 그들은 모를 것이다. 우리 한민족의 끈끈히 맺어지는 정이란 것을. 외국을 나와야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실감 나는 좋은 하루였다.
다음날 오후 1시쯤 배는 에게해 끝쪽에 홀로 둥둥 떠있는 섬나라 키프로스에 도착했다. 키프로스는 우리나라와는 노비자 협정 체결을 맺고 있는 나라였다. 그래서 입국이 아주 쉬운 나라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멀다는 이유로 거의가 모르고 있는 외로운 섬나라에 내가 온 것이다.
키프로스는 그냥 섬과는 달리 시내로 가려면 항구에서 한참을 벗어나야 했다. 뙤약볕에 점점 지쳐갈쯤 시원한 해변과 키 작은 야자수가 즐비한 시내 도로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라가 워낙 더운 탓이라 그런지 은행들은 아침 8시쯤에 문을 열고 정오쯤이면 모두 문을 닫는 추세였다. 점포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침 일찍 문을 열고 오후 한두 시를 기해 모두 폐점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뚜오모와 함께 거리를 걷는데도 죽음의 도시를 걷고 있는 듯했다.
화폐는 키프로스 파운드를 쓰고 있었다. 미화 1달러에 겨우 50키프로스 센트 정도 밖에 안 되었다. 세상에 영국 파운드보다 더 강세환율을 보이는 곳도 다 있다니 여행을 오래 하고 볼 일이었다.
엽서는 한 장에 10센트 정도이고 콜라가 병으로 50센트 가량이었다. 상점에서 파는 가벼운 것들은 모두 3파운드 이내로 다른 관광지에 비해 물가가 싼 걸 보면 좀 의아했다.
보스 30번이 항구와 시내를 연결시켜 주고 있다. 요금은 40센트, 한국 돈으로 7백 원 가량인 셈이다. 이 작은 섬나라에서도 버스비가 천 원 가까이 한다니 그러고 보면 유럽 근처에서는 한국보다 물가 싼 곳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는 말이 사실이었다.
키프로스는 다른 나라와는 달리 여행자들에게 교통이 편리하게 돼 있었다. 거리 곳곳에 버스 표지판과 번호 그리고 그 번호에 해당하는 버스의 경로를 그려놓고 있었다. 더욱이 차가 정류장에 도착하는 시간까지 있어서 좋았다.
그러나 아쉬웠던 것은 유럽처럼 무임승차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버스 매표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선 버스에 올라 운전사에게 돈을 주고 버스표를 받는 식이기 때문이다. 배낭족으로서는 진가(?)를 발휘할 수 없었던 곳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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