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성월 특집] 뇌병변장애 아들과 성지 111곳 6차례 완주한 김광식-최복순씨 부부
“우리에게 보내준 ‘예수님’과 믿음의 길 걸어요”
지난달 7번째 완주 향한 성지순례 나서
연옥영혼 위한 전대사 받으려 계속 이어가
성지순례길은 고행길이자 천국길이다. 육체적으로는 고행길이지만 영적으로는 천국길이다. 주교회의 발간 성지순례 안내 소책자 「한국천주교 성지순례」에 수록된 전국 성지 111군데를 무려 6번이나 완주하고 7번째 완주에 나선 김광식(요셉·62·인천 가좌동본당)-최복순(안나·61)씨 부부의 성지순례길에는 장애인인 큰아들 김병선(베드로·39)씨가 꼭 동행한다.
전국 성지 111곳을 6차례 완주한 김광식(요셉)씨와 아들 김병선(베드로)씨, 부인 최복순(안나)씨(왼쪽부터). 가족 뒤로 방 벽에 붙은 성지순례 완주 축복장이 보인다.
■ 장애인 아들과 동행하는 성지순례
666차례. 김씨네 가족이 전국 성지를 6번 완주하며 이어 온 성지순례는 예수님과 순교자들의 고통과 뜨거운 신앙에 오롯이 하나 되는 체험이었다. 가족의 부축을 받으며 성지순례에 함께해 온 큰아들도 신앙이 스며들어 평소에는 침묵만을 지키다가도 기도문을 외우거나 성가를 부를 때면 기적처럼 입이 열린다. 이성으로는 믿어지지 않는 변화다.
인천 가좌동 아파트 방 벽은 이들이 주교회의에서 받은 성지순례 완주 축복장 25장으로 ‘도배’돼 있다. 전국 성지를 한 차례 완주할 때마다 개인별로 축복장을 받고 가족 단위 축복장도 1장 받게 된다. 1차 완주 때는 작은아들 김병철(바오로·37)씨가 “형을 돕겠다”며 동행해 네 가족이 축복장 5장을 받았다. 이후 병철씨가 일본에 취업하면서 2~6차 완주에서는 세 가족이 축복장 4장씩을 받았다. 2012년 첫 완주를 한 뒤 올해까지 매년 빠짐없이 완주했다. 지난 8월 17일에는 7번째 완주를 향한 순례에 또 다시 나섰다.
언뜻 행복하고 다정한 가족의 순례길이 떠오르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큰아들 병선씨는 태어날 때부터 황달이 나타났고 간질과 뇌수막염도 앓아 뇌병변장애가 있다.
17살 때는 머리에 기계장치를 넣는 대수술을 받았다. 기골이 장대한 덩치와 달리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어린아이처럼 부모가 옆에서 부축을 해야 힘겹게 걸을 수 있다. 입히고 씻기고 먹이는 것까지 모든 것을 부모의 손길에 의지한다.
성지순례에 나서기 전까지만 해도 집 밖으로 마음 편히 나가기도 힘들었다. 비행기 한 번, 배 한 번 타본 적이 없는 큰아들에게 후회 없는 삶을 선물하자는 것이 순례를 시작할 때의 목표였다. 하지만 막상 장애가 있는 아들을 데리고 전국 성지를 찾는 일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행의 연속이었다. 당장 아들을 부축해 아파트 계단을 내려가고 차에 태우는 데도 힘이 쭉 빠졌다. 병선씨는 순례 중 차 안에서 갑자기 용변을 보거나 경기를 일으키기도 하고 혼자 몇 발자국 걷다가 넘어져 이마가 찢어지고 손가락이 부러진 적도 있다. 언제, 어떤 사고가 날지 몰라 김씨 부부는 잠시도 큰아들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다.
2013년 두 번째 완주한 뒤 주교회의 성지순례사목소위원회 위원장 옥현진 주교(앞)와 기념촬영. 김광식씨 제공
2016년 11월 충남 당진 원머리성지 순례 중.
■ 돈, 건강 없지만 ‘시간’ 하느님께 봉헌
남편 김씨도 2007년 뇌경색으로 쓰러져 지금까지 건강이 좋지 않고 아내 최씨 역시 같은 해 뇌협착증을 앓아 약을 달고 산다. 김씨는 개인택시로 생계를 꾸려가지만 오전에만 100㎞ 정도 운전하면 힘이 부쳐 오후에는 쉬는 생활을 반복하고 있다. 불가사의하게도 성지순례만 떠나면 하루에 1000㎞ 가까이 운전을 해도 몸이 가뿐하다. “나도 내 몸이 이해가 안 된다”고 의아해할 정도다. “성지를 향해 운전을 하면 가족들 눈에는 오로지 성지만 보일 뿐 다른 것은 일절 생각나지 않는다”고도 밝혔다.
“우리 가족은 돈도 없고 건강한 몸도 없지만 성지순례를 하며 ‘시간’을 하느님께 봉헌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큰아들을 데리고 순례를 다니려면 시간이 배 가까이 드는 고행을 감수해야 한다. 성지에 도착하면 부부 가운데 한 사람은 성지 성당이나 차 안 등에서 큰아들을 돌보고 다른 사람은 성지를 순례하며 「한국천주교 성지순례」 책자에 성지 확인 도장을 찍는다. ‘성지순례의 참 의미를 잊은 채 도장만 찍으러 다니는 순례자들이 있다’는 지적에 대해 아내 최씨는 “그런 말이 있는 것은 안다”면서도 “성지순례를 실제로 해 보면 그렇게는 말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순교자의 무덤과 발자취가 남아 있는 성지를 찾아가는 길에서도 기도가 끊이지 않고 성지에 도착하면 온 몸과 얼을 바친 기도와 찬미가 절로 나오는데 도장만 찍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 전대사 양도와 ‘천국 살이’의 은총
김씨 가족이 성지순례를 거침없이 이어가는 원동력은 ‘전대사 양도’와 ‘천국 살이’ 두 가지다. 아내 최씨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봉헌생활의 해, 자비의 특별희년 등에 전대사를 부여해 주신 것이 어찌나 감사한지 모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많은 신자들이 전대사에 대해 그저 말만 들어봤거나 아예 관심이 없는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전대사를 받을 수 있는 조건에 성지순례가 포함돼 있어서 김씨 가족은 성지 한 군데라도 더 방문해 전대사 조건을 이행하고 우선은 세상을 떠난 가족들에게, 이어 연옥에 있을 이웃들에게 자신들이 받은 전대사를 양도하고 있다. 전대사를 양도해 1명의 연옥 영혼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급해져 성지순례를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두 부부는 “전대사 양도의 은총을 체험하지 못한 신자들은 아무리 설명해도 믿으려 하지 않겠지만 우리 부부는 똑같은 은총을 수없이 체험했기에 매년 거르지 않고 전국 성지 111군데를 순례할 수 있었다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천국 살이’. 김씨 부부가 6년 동안 꼬박 성지순례를 이어오면서 가진 또 하나의 확신이다.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살아서 천국 살이를 해야 죽어서도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는다. ‘하늘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마태 25,1)는 성경 말씀에서 지혜로운 처녀들은 등불과 기름을 미리 준비해 신랑을 맞이하지만 기름을 미리 준비 못한 어리석은 처녀들은 신랑을 맞이하지 못한다는 비유를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 혼자서는 아무 것도 못하는 39살 장애인 큰아들이 육체적으로는 견디기 힘든 고통일지라도 영적으로는 하느님이 김씨 부부에게 보내준 ‘예수님’이자 세상 구원을 위한 도구로 다가왔다. 큰아들과 함께 떠나는 성지순례가 지혜로운 처녀들이 미리 준비한 기름과도 같은 이 세상에서의 천국 살이였다.
음악 용어라고는 아는 것이 없는 아내 최씨는 지난해 12월 6일 대림시기에 ‘여기서 천국 살아’라는 곡을 작사, 작곡했다. 영감이 떠오르는 대로 가사를 쓰고 악보를 그렸더니 곡이 됐다. 올해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5월 29일)에는 새롭게 떠오른 악상으로 ‘일어나 비추어라’를 작사, 작곡했다. 두 악보와 성경말씀 한 구절을 예쁘게 포장해 성지순례에서 만나는 순례자들에게 선물하며 ‘천국 살이’의 기쁨을 나누고 있다.
매년 전국 성지를 순례하면서 못내 아쉬운 점도 있다.
“초기에는 순교자 무덤만 덩그러니 있어도 기도가 터져 나왔습니다. 성지를 개발하더라도 되도록 성지 원형을 잘 살려 성지 순례의 참맛을 보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최복순씨가 순례를 다녀온 후 쓴 일기장
작사, 작곡한 ‘여기서 천국 살아’와 ‘일어나 비추어라’ 악보.
박지순 기자 beatles@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