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과오의 하나는 이단자들을 잔혹하게 처형했던 이단심문제도일 것이다. 일반적으로「종교재판」으로 부르고 있지만 이는 원어의 본뜻이나 그 내용으로도 옳지 않은 번역이다. 원어의 인꾸이시씨오(Inqui-sitio)는「탐문ㆍ심문ㆍ조사」라는 뜻으로 이단의 혐의를 받고 있는 자들의 주장이나 가르침이 그리스도교의 정통적인 가르침에 부합하는지의 여부를 신문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이단 심문의 배경이 비록 국가의 정치적인 동기에 있다 할지라도 교회의 이름으로 수행되었고 또 교회에서 어느 정도 묵인한 사실도 있으므로 잘못의 책임을 피할 수 없다고 본다.
15세기 말부터 제도적으로 실시한 이단 심문의 대표적인 예는 스페인 교회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유럽에서 경제적인 자유 이외에는 시민의 권리를 전혀 인정 받지 못한 유대인들은 자연히 경제활동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유대인들이 경제적인 면에서 남다른 수완을 발휘하는 것은 이러한 역사적인 까닭도 있지 않나 생각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축적하는 그들의 경제적 수완은 본토인들로부터 질시와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영국에서는 1290년에, 프랑스에서는 1314년에 유대인들이 추방되었다. 1391년 스페인에서 유대인 박해가 시작되자 죽음과 개종이라는 양자택일의 기로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세례를 받았으나, 대부분 피상적으로만 개종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베리아 반도에 남아있던 아랍인들을 완전히 재정복한 스페인은 정치, 종교, 민족적으로 철저한 일치를 추구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아랍인들과 부자이며 기업가들이었던 개종한 유대인들은 가톨릭 구교도들로부터 의심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갈등은 스페인 이단 재판을 도입하게 된 토대가 되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과 히브리인들 사이의 반목이 단순히 교리적인 이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 본다. 그리스도교인으로 개종한 유대인들과 아랍인들이 여전히 유대교 신앙이나 이슬람 신앙을 비밀리에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 것으로 고발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종교적인 단일성의 바탕에서 민족주의적 국가의 일치를 모색하는 당국에 위협적인 문제로 부각되었다. 그래서 15세기 말 스페인 혈통의 순수성의 원칙에 입각한 보호위원회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초기에 주교들은 그러한 운동에 반대하였지만 가톨릭 신자인 왕들은 종교적인 일치와 국가적인 일치를 동일하게 생각하고 이러한 일치를 이루는 것을 그들의 사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왕은 이단 심문을 교황에게 신청하여 소위 이단 심문이라는 제도를 실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시되자마자 과도한 남용이 자행되어 1481년 교황은 이에 항의하였고 1482년 1월과 10월에 교서를 발표하여 왕립 이단 심문에 주교가 통제할 수 있는 기능을 부여하고 로마에 항소할 수 있도록 하였다.
군주정치하에서 자행되던 이단심문은 교황의 항의에 어떠한 후속조처도 하지 않았고 교황은 이를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스페인 이단 심문이 국가적인 이단 심문으로 제도화되었고 이를 완화하려는 교황청의 노력은 별 효과를 내지 못하였다. 식스토 4세 교황(1471~1484)은 후에 이사벨라 여왕에게 사법권을 가진 스페인 전역의 이단 심문 총책임자를 임명하도록까지 허락하였다.
여왕에 의해 이단 심문 총책임자로 임명된 도미니꼬 회원인 토마스 또르꿰마다(Tom-maso Torquemada)는 이단심문을 독재적으로 운영하였다. 참수형이 2천여 명에 달한다고 하나 근래 역사가들의 연구에 의하면 그 숫자와 처형의 실상이 많이 과장된 것으로 드러났다.
1492년 이후 왕립 이단 심문은 순수한 스페인 그리스도교에 속하지 않은 유대인들과 아랍인들을 민족주의적이고 이념적인 국가의 적으로 간주하고 그들을 억압하는 민족주의적인 원칙을 법제화하였다. 그래서 시빌리아 등 다른 지역에서는 소위「신앙의 판결」(Autos da Fe)이라는 이단 심문 판결 선고식을 성대하게 치루며 잔혹하게 실시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비복음적이고 비인간적인 이단 심문은 신앙의 순수성과 관습의 권위에 봉사하고자 하였던 본래의 가치를 상실하고 세속적인 험담과 시기, 질투에 의한 고소 고발로 무고한 사람들을 많이 희생시켰다.
물론 교황들과 주교들이 이단심문제도에 항의하였지만 국가적인 제도로 실시하는 왕들의 주장을 누그러뜨리는 데 실제적인 효과를 내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을 후원하는 것이 아메리카 대륙을 그리스도교화하며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의 위협을 억제하는 데 필요했기 때문이다. 스페인 교회의 이러한 분위기는 새로운 선교지역에서도 어느 정도 반영되고 있다고 본다.
이단 심문의 사례는 교회가 복음의 누룩을 받아들이고 복음의 힘으로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기보다는 인간적인 이해타산으로 제도의 편리성에 의존하면서 복음의 근본적인 가르침을 포기하고 그 시대의 비복음적인 사회에 어울려버릴 때 교회제도가 어떠한 말로를 가져왔는지 깨닫게 한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