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신문 수원교구 창간 10주년] 르포- 칠레 산티아고대교구 ‘피데이 도눔’ 사제 문석훈 신부의 하루
서툴지만 진심담은 스페인어 강론, 신자들 얼굴엔 미소가
“캄캄한 한밤중에 돌아온 사제관… 고단해도 영적 기쁨 나눠 뿌듯”
문석훈 신부(맨 뒷줄 오른쪽에서 다섯번째)가 칠레 산티아고대교구 마리아미시오네라본당 청소년 청년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로. 한국교회는 성직자를 영입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신앙선조 시대부터 불과 200여 년 만에 성직자가 부족한 곳에 선교사제를 파견하는 교회로 성장했다. 특별히 피데이 도눔은 선교사제가 현지의 교구사제로서 사목할 수 있도록 파견하는 방법이다. ‘선교사’가 아닌 ‘교구사제’로 활동하는 만큼 현지인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고 현지 교구의 복음화사업에 더욱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
올해는 교구가 첫 피데이 도눔을 맺은 지 10년째 되는 해다. 특히 지난 7월 교구는 칠레 산티아고대교구와도 피데이 도눔을 체결, 백윤현·문석훈 신부를 파견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 창간 10주년을 맞아 칠레 산티아고대교구 마리아미시오네라본당 선교현장을 찾았다. 피데이 도눔 사제의 하루는 이른 아침부터 자정 무렵까지 분주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 칠레 신자들을 만나기 위한 노력
슥, 스슥, 슥.
9월 23일 칠레 산티아고대교구 마리아미시오네라본당 사제관. 고요한 사제관에 펜과 노트가 마찰하는 소리가 퍼졌다. 문석훈 신부는 스페인어로 꼼꼼하게 글을 써간다. 그러고는 자신이 써놓은 글을 한참 살피다 이번에는 형광펜으로 줄을 긋는다. 테이블에는 스페인어로 된 미사경본을 비롯해 각종 교회서적들, 그리고 우리말로 된 유일한 책인 매일미사 책이 놓여 있다. 문 신부는 미사 중 신자들에게 들려줄 강론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상대적으로 사람들을 만날 일이 적은 오전시간은 강론을 준비하기 가장 좋은 시간이다. 늘 미소로 사람을 대하는 문 신부지만, 이 시간만큼은 더없이 진중한 표정을 짓고 있다.
“오히려 스페인어로 쓰는 게 (강론하기) 더 쉬워요.”
우리말로 쓰고 번역하는 게 낫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문 신부가 답했다. 스페인어로 준비해야 작성을 하면서 강론을 머릿속에 정리할 수 있고, 강론에 사용할 표현들도 익힐 수 있다는게 이유다.
그러면서 “자신이 한국인 신부이기 때문에 강론을 준비하는 데 장점이 있다”고 했다. 칠레 사람들에게는 한국 사람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 자체가 복음을 새롭고 신선한 시각에서 볼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지금은 스페인어로 강론을 써내려가고 있지만, 해외선교를 준비하면서 처음으로 스페인어를 접한 문 신부에게 스페인어가 쉬울 리 만무했다. 해외선교 사제를 위해 준비된 언어교육 외에도 별도로 시간과 비용을 들여서 언어공부를 했다. 사목을 위해서는 현지 신자들과 보다 원활히 소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석훈 신부가 본당 신자와 ‘베소’로 평화의 인사를 나누고 있다.
◈ 우리 본당 신부님
“올라! 빠드레!(안녕하세요 신부님!)”
오후가 되자 문 신부가 성당을 나섰다. 본당에서 봉사하고 있는 신자들과 만나기 위해서다. 토요일 오후 본당에는 여러 봉사자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문 신부를 본 신자가 문 신부에게 볼을 맞대며 반갑게 인사했다. 남미의 보편적인 인사인 베소(Beso)다.
우리에겐 어색한 인사방식이지만, 문 신부는 성당을 찾는 모든 신자와 빠짐없이 인사를 나눴다. 주일에는 문 신부에게 인사하는 신자들의 수가 수백 명에 달한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과 볼을 맞대면 볼이 아프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지만, 문 신부는 빠짐없이 기쁜 표정으로 만나는 모든 신자들과 인사를 나눈다.
문 신부와 인사를 나눈 신자들은 마치 친구를 만난 듯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놨다. 문 신부는 그런 신자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다 들어줬다. 신자들에게 문 신부는 ‘선교사제’가 아니라 ‘우리 본당 신부님’이었다.
문 신부는 “백윤현 신부님과 이 본당에 올 때 신자들과 최대한 가깝게 지내보자고 이야기했다”면서 “한 번에 약속을 여러 개 잡지 않는 대신 만난 사람과 최대한 시간을 같이 보내주려 노력한다”고 했다.
띵! 봉사자들과 인사를 마친 문 신부의 휴대전화에서 알림음이 났다. 본당 신자에게 온 메시지였다. 문 신부와 신자들의 만남은 온라인에서도 계속 됐다.
장문의 메시지였지만, 문 신부는 꼼꼼하게 읽고 답장을 한다. 주일에 있을 행사 때 필요한 물품에 관한 문의였다. 답장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알림음이 울린다. 이번엔 또 다른 신자다. 휴대전화가 쉬지 않고 울리지만, 문 신부는 귀찮은 기색 없이 메시지를 받고 답장했다. 물론 모두 스페인어다.
메시지의 내용은 본당의 크고 작은 일에서부터 개인적인 상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문 신부는 본당 신자들의 연락에 일일이, 때로는 사전을 찾아가면서 모든 메시지에 응대했다.
본당 산하 산타데레사공소의 파밀라씨는 “한국 신부님들은 참 따뜻한 것 같다”면서 “어린 아이들이 다가오는 것도 귀찮아하지 않는 모습에 신부님들께 더 다가갈 수 있었고 마음을 열 수 있었다”고 말했다.
산타데레사공소 미사를 마친 문 신부가 따라 나온 어린이의 손을 잡고 퇴장하고 있다.
◈ 문화의 나눔으로 신자들과 더 가깝게
“장미꽃과 넝쿨로 칠레의 문화에 흘러넘치는 하느님의 사랑을 표현할 거예요.”
문 신부가 성당 제대 앞에서 전례꽃꽂이를 어떻게 할 지 설명했다. 9월 24일 칠레 독립기념일 기념미사를 맞아 준비하는 전례꽃꽂이다. 봉사자들은 문 신부에게 조언을 구해가며 제대 앞을 꾸미고 있었다. 미리 준비한 소품을 놓고 꽃을 꽂는 봉사자들의 작업이 다소 서투르기는 했지만, 좋은 전례꽃꽂이를 만들기 위한 마음이 느껴졌다.
매주 전례꽃꽂이 봉사를 하고 있는 카탈리나(35)씨는 “그동안 제대에 꽂힌 꽃들로 하느님을 찬양할 생각을 못했는데, 전례꽃꽂이를 통해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어 기쁘다”고 소감을 말했다. 그녀는 “전례꽃꽂이를 준비하면서 스스로 하느님께 감사할 수 있게 됐다”면서 “다른 사람들도 이 꽃꽂이를 보면서 하느님을 생각하고 찬양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본당에서 전례꽃꽂이를 시작한 것은 교구 사제들이 부임하면서다. 칠레에 전례꽃꽂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문 신부는 교구에 전례꽃꽂이 관련 책과 자료들을 요청해 본당 신자들에게 소개했다. 지난 예수부활대축일에 처음 선보인 전례꽃꽂이에 신자들의 반응이 좋아 지금까지 이어오게 된 것이다. 문 신부는 “저도 꽃꽂이는 잘 모르지만, 신자들이 재미있어 해서 함께 하고 있다”고 말하고 “나중에 한국에 가면 배워와야겠다”며 웃었다.
전례꽃꽂이를 준비하고 있는 중에 꼬니(16)양과 그 가족이 찾아왔다. 주일 행사 때 입을 한복을 미리 입어보기 위해서다. 본당은 독립기념일과 동시에 이주민의 날을 기념해 주일미사에 각자 전통복장을 입고 미사를 드리기로 했다. 이에 문 신부도 교구에 요청해 남자·여자 한복을 받아뒀다.
꼬니양은 “한복을 입어볼 수 있다는 이야기에 예정돼있던 캠프도 마다하고 성당으로 달려왔다”면서 “한복을 입어보는 경험이 너무 좋았고, 앞으로도 (한국의 문화를 체험하는) 이런 기회가 더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문 신부의 한국문화 전파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날 사제관 주방에서는 한국음식강좌가 펼쳐졌다. 이주민의 날을 맞아 주일미사 중 각국의 전통음식을 봉헌하기로 했는데, 이번 기회에 신자들이 한국음식을 배우고 싶어 한 것이다. 이미 문 신부가 여러 차례 신자들에게 한국음식을 만들어 줘 신자들에게는 그렇게 낯선 음식이 아니었다.
특히 본당 지역은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사는 지역으로 콜레스테롤이나 혈압이 높아 고생하는 환자가 많아 문 신부가 소개한 한국음식들은 신자들 사이에서 건강식으로 인기가 많았다.
문 신부는 “신자들에게 한국문화를 소개하면서 서로 문화 차이를 극복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신자들과 더 친해질 수 있어 사목에도 도움이 된다”고 했다. 문 신부는 “본당 신자 대부분이 가난하고 부족함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라면서 “제가 신자들을 위해 조금만 무언가를 하면 그 기쁨의 효과가 몇 배가 된다”고 이야기했다.
본당 사제관 주방에서 신자들에게 한국음식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고 있는 문석훈 신부.
◈ 하느님 하나로 함께 기뻐할 수 있다면
오후 6시. 온종일 신자들과 만난 문 신부는 외출 채비를 하고 차에 올랐다. 농촌지역에 자리한 본당 산하 산안드레스공소와 산타데레사공소에서 미사를 주례하기 위해서다. 산티아고시 외곽에 자리한 본당 산하에는 도시공소 4곳과 농촌공소 2곳이 있다. 공소들을 찾아다니며 신자들을 돌보는 것도 중요한 사목이다.
강론이 시작되자 신자들의 얼굴에 방긋방긋 미소가 피어올랐다. 스페인어로 진행되는 강론이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문 신부의 강론에 신자들이 기뻐한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교리교사 대표자모임 회장을 맡고 있는 로니씨는 “한국 신부님들의 강론이나 사목하는 모습이 새롭고 역동성이 있을 뿐 아니라 영적으로 새로운 선물을 받는 느낌”이라면서 “신자들이 그 영적인 선물에서 힘을 얻고 더 많이 참여하게 되는 것 같다”고 했다.
두 공소에서의 미사를 마치고 사제관에 돌아오니 시곗바늘이 벌써 10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문 신부의 일과는 끝나지 않았다. 사도예절 요청이 온 것이다. 사실 본당 인근은 치안이 좋지 않아 저녁에는 현지인들도 외출을 하지 않는 편이지만, 문 신부는 망설임 없이 영대와 기도서를 챙겨 나갔다. 사제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신자들을 그냥 둘 수 없었다.
밤 11시. 그제야 하루 일정을 마친 문 신부가 저녁 식사를 시작했다. 문 신부가 이렇게 늦은 시각까지 일정을 소화해야하는 날은 비단 토요일만이 아니다. 평일에도 본당 여러 단체의 회의에 참석하다보면 자정이 다돼 사제관에 들어오는 일이 허다하다고.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문 신부는 밝게 웃으며 “재미있다”고 대답했다. 문 신부는 “무엇보다도 신자들이 교회 안에서 재미있고 행복할 수 있길 바란다”면서 “말도, 민족도, 문화도 다르지만 하느님 하나로 함께 기뻐할 수 있다면 그게 제 사제로서의 삶”이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문 신부는 “이렇게 신자들에게 다가가는 선교가 가능한 건 교구가 끊임없이 필요할 때마다 관심 갖고 도움을 주기에 가능하다”면서 “기도와 후원으로 함께해주시는 교구민들께 감사하다”고 전했다.
칠레 산티아고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