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 예수님.
‘학기말 증후군’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겨울 방학을 3주 남짓 남겨놓고 있는 지금, 그동안 쌓인 피로에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쳐있음을 계속 느끼는 요즈음입니다. 더구나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1학기 말보다는 한 해가 끝나가는 2학기의 마지막이 더 힘겹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방학만 와라!’ 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지요. 물론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다른 분들께 또다시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그래도 저는 방학이라도 있어서 길게 쉴 수 있는 여유가 있지만, 방학이 없는 훨씬 더 많은 분들께는 꿈만 같은 이야기, 배부른 소리 하는 것으로 들릴 테니까요. 그래서 다른 분들께는 죄송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힘든 걸 어쩌겠습니까? 제가 느끼는 힘겨움은 제 주관적인 상황 안에서는 나름대로 현실이니까요. 그래서 오늘 하루도 방학이 며칠 남았는지를 셈하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신문사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올 초에 말씀드렸다시피, 원래 이 지면의 글을 한 해 동안 연재하기로 계획하고 시작한 것인데, 글의 내용이 좋고 또 독자분들의 반응도 좋아서 조금 더 연장해서 써줄 수 있겠냐는 내용이었습니다.
사실 이미 가을에 접어들면서부터 남은 연재 횟수가 몇 번인지를 헤아렸었습니다. ‘아, 이제 몇 번 안 남았구나. 이 일이 다 끝나면 부담이 훨씬 줄겠구나’ 하면서 연재가 끝나길 내심 기다리는 마음이었죠. 물론 그동안 글을 써오면서는 감사한 마음도 많았습니다. 글을 쓰면서 제 스스로 많은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고, 또 그러는 가운데 몇몇 분들께도 도움이 될 수 있었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니까요. 하지만 그러면서도 글을 쓰는 부담이 적지 않았기에, 연재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랬던 저였기에 찾아오신 담당 기자께서 말씀을 꺼내셨을 때 제 첫 마음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거절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이제는 더 풀어낼 것도 없고, 한 해 동안 쓸 계획으로 진행했던 것이라 내용 전개도 맞지 않고, 또 신학생 양성소임에 더 전념하기 위해서 다른 일을 줄이려고 하고…. 여러 이유를 대면서 연재를 계속하는 것은 어렵겠다고 말씀드렸죠. 그랬더니 담당 기자께서 여러 좋은 말씀을 해주시면서, 조금 더 생각해보고 결정해주기를 부탁하시고는 돌아가셨습니다.
그때부터 제 고민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제 안에서 여러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먼저 들었던 것은 우쭐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래, 내가 쓰는 글이 반응이 좋구나. 그럼 그렇지!’ ‘이런 반응이라면 연재를 계속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더 쓰겠다고 말씀드려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제 안에서 일어난 과시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에 이어서 금방, 더는 못하겠다는 마음도 들었습니다. 사실 썩 좋은 글도 아니고, 또 이 글 쓰는 것 때문에 알지도 못하는 이들에게 괜히 안 잡혀도 될 흉이나 잡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던 적도 종종 있었지요. ‘그래, 사람들의 반응이 좋다던 담당 기자의 말도 사실은 나를 격려하기 위해서 지어낸 말일 거야.’ 이제는 더 풀어낼 이야깃거리도 없다고 생각하니, 연재를 더 하려는 건 스스로를 드러내려는 헛된 욕심일 뿐이다 싶었습니다. 제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자기비하의 욕구였습니다.
이렇게 저를 드러내고 싶은 마음과 또 스스로 자신 없어 하는 마음들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그런 고민을 하는 것조차 힘겨워졌습니다. 그리고는 더 고민할 것 없이 거절해야겠다고 마음먹으려던 순간, 거절에 대한 부담감이 크게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또 간곡하게 부탁하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절하면 제가 어떤 사람으로 비춰질까 하는 마음이 들었던 거죠. 담당 기자께도 또 신문사에도 좋은 사람으로 비춰지고 싶은 마음, 그래서 속으로는 힘겨워하면서도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마지못해 응하게 하는 욕구, 비난/실패를 피하려는 욕구였습니다.
‘어떤 결정이 정말 하느님 마음에 드는, 그리고 교회를 위한 일일까’ 물었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가졌던 마음, 그리고 앞으로 조금 더 연재를 계속한다면 어떤 마음으로 써나갈 수 있을지 물었습니다.
어쨌거나 제 자신을 생각하는 마음이라면, 힘들더라도 거절하는 게 더 좋을 겁니다. “어렵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말씀드리는 것이 어렵기는 해도, 그때만 지나면 나머지 시간들은 더 편안하게 지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우쭐하는 마음이나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마음 때문에 거절하지 못하고 연재를 계속한다면, 이후의 시간들은 ‘내가 바보같이 왜 그랬을까’ 후회하며 계속해서 스스로를 탓하는 시간으로 보내게 될 것입니다. 제 자신을 탓할 뿐만 아니라 연재를 더 해달라고 부탁하신 분들에 대한 원망의 마음도 생길 수 있겠죠.
모두, 나 중심의 모습입니다. 내가 편하자고 거절을 하든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어서 수락을 하든, 모두 제 자신을 먼저 생각하고 위하려는 모습인 것입니다.
하느님 중심, 너 중심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생각했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께는 아니어도 그중 몇몇 분에게만이라도 하느님을 만나는 데에 작은 도움이라도 드릴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고 감사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군데군데 흠 잡힐 구석이 많은 글이라 하더라도, 그걸로 인해 안 드러날 수도 있었던 제 부족함이 드러난다 하더라도, 그게 지금의 제 모습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괜찮겠다 싶었습니다. 그런 부족함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저라는 사람 전체가 다 부족하다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닐 테니까요. 이런 마음이라면, 연재를 계속하더라도 그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겠다 싶었습니다. 물론 글을 써 나가다 보면 또 언제고 소재가 떠오르지 않아서 속을 끓일 때가 있을 겁니다. 마감 시간을 지키지 못하고 담당 기자님께 죄송하다는 연락을 드려야 할 때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때 내가 왜 거절하지 못했을까? 난 왜 이렇게 바보 같을까?’ 하는 자기비하와 자책감은 들지 않을 것입니다.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제가 기꺼이 받아들인 선택이니까요. 이런저런 생각과 더불어 몇몇 분들께 의견을 구하면서, 결국 연재를 조금 더 이어가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나 중심의 욕구들에서 벗어나 너 중심의 모습으로 건너가는 것, 그 여정에 있을 어려움을 알면서도 선택하는 것! 우리의 삶이 모두 다 너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겪게 되는 크고 작은 일 안에서 그때그때 너 중심의 모습을 찾고 선택해 나가는 것, 이것이 우리 삶으로 드리는 기도가 아닐까요?
“정녕 주 하느님, 제 눈이 당신을 향합니다.”(시편 141,8)
민범식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서품을 받았으며 로마 그레고리오대학에서 영성신학 박사와 심리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