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냉담 끝에 신앙생활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사실 세례를 받자마자 시작한 냉담이었기 때문에 ‘다시’가 아닌 ‘처음’ 시작했다는 말이 맞을 수도 있겠습니다. 온 가족이 함께 받게 된 세례는 사실 제 뜻과 상관없이 이뤄진 일이란 생각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던 중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본당 장례식장에서 장례를 치렀습니다. 처음에는 성당에서 계속 보냈던 시간도, 계속 찾아오시는 한 번도 뵌 적 없는 본당 교우분들도, 계속되는 연도소리도 너무 낯설었습니다. 더 놀라웠던 것은 장지가 꽤 먼 곳이었음에도 함께 와주셨던 연령회장님이었습니다. 아버지가 감사함에 내미셨던 약간의 성의 표시조차 받지 않으시고 오히려 본당에 헌금하시면 좋겠다하신 말씀도 너무 신기했습니다. 어떻게 아무 대가 없이 이렇게 함께 해주실 수 있을까라는 의아함은 성당활동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때 막 고등학교를 졸업했던 저는 부모님께 저도 성당에 한번 나가 볼까요라는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그렇게 청년회에 들어갔습니다. 청년회는 참 재밌는 곳이었습니다. 또 그들과 함께하는 신앙생활은 재밌고 행복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성당사람들은 모두 다 하느님을 믿기 때문에 천사 같은 마음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제 믿음은 금이 가기 시작 했습니다. 서로에게 가시가 되는 말이 오가고, 다툼이 생기기도 하고, 오해가 산더미처럼 커져 누군가는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기도 했습니다. 성당에서, 성당사람들과 이런 일들이 생긴다는 사실 자체가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몇 주 동안 성당에 나가는 것을 피했습니다. 그러던 중 가장 좋아했던 언니에게 편지를 받았습니다. 달랑 몇 줄뿐인 편지였지만, 그 편지가 5년 전 그때부터 지금까지 저를 붙잡아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손을 놓지 않고 있고, 그러지 않을 것임을 믿는다면 우린 또 함께할 수 있어.”
세상에서는 자꾸만 누군가의 손을 놓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앞으로 나와 계속 볼 사람인가에 대한 작은 선을 긋고,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인가를 고민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 안에서는 누군가의 손을 잡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넘어서 나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많은 이들에 손을 꼭 잡기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신부님께서 성당에서도 끊임없이 생기는 갈등과 다툼으로 고민하던 제게 성당도 똑같이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너무나도 당연히 갈등이 생기고 다툼이 생기고 때론 상처도 생긴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느님의 큰 사랑과 힘으로 그런 갈등과 상처 속에서도 손을 놓기보단 잡기를 시도하려 노력하고 그게 되지 않을 땐 하느님만큼은 우리 손을 꼭 붙들어 주심을 이야기해주셨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무조건적으로 내가, 또 다른 사람이 ‘천사 같다’는 환상 속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맺고 갈등 속에서 성장하는 모든 과정 속에서 하느님을 닮아가려 노력하고 또 그것을 위해 기도하고 잡은 손을 놓지 않는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다음 주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