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축 이전 옛 고등동성당.
고등동성당이 첫 주교좌성당이었던 만큼, 교구청 조직도 처음으로 이 자리에서 이뤄졌다. 교구는 성당 옆에 수녀원으로 사용하던 일본식 가옥을 주교관 겸 임시 교구청으로 사용했다.
초대교구장 윤공희 대주교는 1963년 12월 27일 교구 사무를 총괄하는 부감목(현 총대리)에 장금구 신부를, 요즘 교구 사무처장과 주교 비서 업무를 하는 상서국장에 손태섭 신부를 임명했다. 주교를 포함한 단 3명이 교구청 조직의 전부인 작은 교구청이었다.
이후 교구의 구체적인 특수사목을 담당할 위원을 임명하고, 교구 행정이 점차 복잡해지면서 규모 있는 교구청사가 필요해졌다. 1967년 10월 20일 화서동에 새 교구청 축복식이 열리기 전까지 이곳은 교구의 교구청으로 기능했다.
혹시 남아있을지 모를 옛 주교좌성당과 교구청의 모습을 찾아보고자 사무실을 찾았다. 아쉽게도 신축 이전의 모습은 남아있지 않다는 답변뿐이었다. 하지만 사무실 한편에서 옛 성당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옛 성당 사진이었다.
사진에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성당 모습이 남아있었다. 간결하고 아담한 외관을 지닌 전형적인 바실리카 건축양식 성당이었다. 1층에는 신자석이 2층에는 성가대석이 있었다고 한다. 1, 2층을 합쳐 400㎡에 불과한 성당이었지만, 14년 동안 주교좌로서 교구의 주요행사를 도맡았다.
바로 이곳에서 초대교구장 윤공희 주교가 착좌한 이래로, 8차례 서품식에 걸쳐 30여 명 부제가 사제로 서품됐다. 1971년 김영근 신부, 1975년 강주희 신부, 1976년 정원진 신부의 장례미사도 이곳에서 집전했다. 그리고 2대 교구장 김남수 주교의 주교서품식과 착좌식이 이곳에서 거행됐다.
현재의 고등동성당.
바오로 6세 교황은 1973년 1월 당시 광주대교구장이었던 한공렬 대주교가 선종하자, 윤공희 주교를 광주대교구장으로 임명했다. 교구장은 공석이 됐고, 정덕진 신부가 교구장 직무대리를 하며 새 교구장의 탄생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1년 후인 1974년 11월 21일 이곳에서 열린 주교서품식에서 김남수 주교가 서품됐고, 교구장으로 착좌했다. 김 주교는 회고록을 통해 당시 풍경을 이렇게 회상했다.
“고등동성당은 아주 작아 한 500명밖에 수용하지 못했다. 그때 온 사람이 사제단 200명에 평신도가 2000명도 넘었으니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은 입구에 서 있거나 밖에 서 있어야 했다. 서품을 받는데 분심이 들었다. 성인호칭 기도할 때 엎드려 ‘주교좌성당이 너무 작아서 안 되겠다. 좀 더 큰 것으로 지어야겠다’는 생각만 했으니, 나는 엎드려서 성당 한 채를 다 지었다.”
그때 김 주교가 ‘엎드려서 지은 성당’이 실제로 완공된 것은 1977년이다. 고등동성당은 14년간 주교좌로서의 임무를 마치고 준주교좌 성당이 됐다. 이후 본당 신자가 4000여 명이 넘어서면서 이용에 불편이 커지자 1988년 지금의 성당을 준공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