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엔트 공의회는 그 규모로 보아 초라하지만, 서 말 밀가루 반죽의 누룩처럼 그 결과는 후대 교회에 두고두고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을 정점으로 교회의 모습이 최악의 상태로 보였던 그 즈음에 자신들의 삶으로 교회의 가장 순수한 모습을 증거하던 수많은 성인 성녀들이 있었다.
1520년부터 1620년 사이에 살았던 이러한 증거자들 가운데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성인으로 시성된 분들만 해도 무려 36명이나 되었고, 또 16세기에 창설된 수도회만 하더라도 17개나 되었다.「죄가 많은 곳에 더욱 풍부한 은총이 내린다」는 복음 말씀을 마치 입증이라도 하는 것처럼 교회의 모습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을 즈음에 성령의 새로운 공현처럼 교회는 새로운 모습으로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성인과 악인을 함께 품고 있는 교회가 인간적인 폐해들로 가득 차 있는 집단으로만 보였을 때에도「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소수의「남은 자」들을 통하여 성령의 역사하심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래서 필자는 이 시대를「성인들의 시대」로 부르고자 한다.
일부분만을 보고 전체를 매도하여 평가하면서 유구한 세월을 통하여 이루어진 정통적인 전통을 무가치하게 팽개치고 기존의 모든 가치를 거절하며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태도보다는 인간적인 숱한 모순과 실수와 비참성을 십자가의 신비 안에서 극복하려고 하느님께 의지하며 자기 자신으로부터 회개를 시작하는「작은 자」들에 의해서 참된 개혁은 이루어진다. 이들은 인간적인 어줍잖은 솜씨와 들뜬 열정으로 자기들의 성과를 뽐내고 싶어하는 유혹을 물리치고, 80 고령의 할아버지가 호두나무 씨앗을 심는 정신으로, 그리고「겨자씨」나「누룩」의 역할로도 황송해하는 정신으로 하느님의 섭리에 자신들을 철저히 내맡길 뿐이다. 이 시대의 성인들 가운데 몇 분만 소개하고자 한다.
필립보 네리(1515~1595)는『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필립 4, 4)라는 말씀에 걸맞게 찡그린 성인이 없듯이 낙천주의적인 기질로 언제, 어디서나 활달 명랑하게 생활하며 누구에게나 줗게 대해주었다. 이러한 생활은 모든 것을 선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섭리에 철저히 의지하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그는 한때 상업에 종사하기도 하고 공부도 하였지만, 어느 한 순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봉사해야겠다는 소명을 느끼면서 자신의 모든 재산은 물론이려니와 책까지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애긍하였다.
그는 36세에 사제로 서품되어 하루의 대부분을 고해성사 주는 것으로 보내면서 사람들을 모아 자기의 좁은 방에서 종종 묵상회를 가졌던 것이 후일 기도의 집 오라또리오(Ora-torio)를 창설하는 계기가 되었다(1552년). 무겁고 어쩌면 침울하게까지 보인 당시 영성생활의 모습을 밝고 명랑한 모습으로 변모시켰다.
스페인 아빌라의 대(大)데레사(1515~1582) 성녀는 12세 때 어머니를 잃고 성모상 앞에 꿇어 눈물을 흘리며 자기의 어머니가 되어 달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19세 때 가르멜수도회에 입회하여 수도생활을 하면서 당시 이완된 수도생활에 회의를 느끼며 자기 수도회를 개혁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수도회를 창설할 것인가 많은 갈등을 하였으나, 결국 자기 수도회 안에서 개혁을 위한 한 알의 씨앗이 되기로 결심하고 온갖 모함과 질투를 무릅쓰고「하느님 없는 나는 무요, 나에게 하느님은 전부」이며「모든 일에 있어서 주님의 거룩한 뜻을 이행한다」는 신조를 가지고 순교자적인 정신으로 생활하였다.
종종 자신의 짧은 생각에서 비롯된 오해일 수도 있지만, 인간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자기 공동체의「모순」에 실망하여 자꾸 밖으로 눈을 돌리는 선의의 사람들에게는 좋은 교훈이 아닌가 생각한다. 당시 이완된 수도생활을 질책하며 자기 스스로 엄격한 수도생활을 함으로써 다른 수도자들로부터 시기ㆍ질투ㆍ모함을 받았던 십자가의 요한(1542~1591) 성인의 도움을 많이 받은 데레사 성녀는 깊은 신비사상과 하느님에 대한 무한한 사랑으로 쇠퇴일로에 있던 가르멜 봉쇄수도회를 쇄신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17세기의 스페인과 프랑스의 정신과 신심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예수회를 창설한 로욜라의 이냐시오(1491~1556) 성인도 교회 역사에 뛰어난 업적을 남긴 성인들 중의 한 분이다. 그는 궁정의 군인으로 봉사하다가 1521년 부상을 입고 병상생활을 하는 중에 하느님을 위하여 일생을 바칠 소명을 느꼈다. 약 일 년 간의 은둔생활에서 신비사상의 체험을 하였고 이때 기록하였던 피정 내용이 그 유명한「영신수련」이며, 이때부터「모든 것을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가 그의 일생을 이끈 생활 신조가 되었다.
그는 사제가 되려는 결심을 세우고 철학을 공부한 후에 파리로 가서 더 많은 공부를 하면서 교회를 위해 봉사할 동지들을 규합하고 프란치스꼬사베리오를 비롯한 여러 동지들과 함께 1534년 파리의 몽마르트르에서 청빈과 정결서원을 하였다. 철학과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1537년 사제품을 받았다. 얼마 후 수도회를 세운 후 1540년 바오로 3세 교황으로부터 수도회 인가를 받았다. 그도 역시 교계제도적인 교회와 갈등을 가졌지만, 인간적인 약함과 하느님의 거룩함을 구분하여 교회 밖에서가 아니라 교회 안에서 교회의 합법적인 권위에 순명하면서 그의 소명에 충실하였다.
『모든 것이 오직 하느님에게 매인 것처럼, 그렇게 기도하여라. 그러나 네 구원이 완전히 네게 매인 것처럼, 그렇게 협력하여라』라는 말로써 은총과 인간의 협력문제를 명쾌하게 설명하여「다만 은총으로」의 원칙을 거부하였다. 그는 가톨릭교회의 신앙을 올바르게 가르치는 교육과 선교에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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