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
종교가 그 고유한 역할의 한계를 넘어 속권에 깊이 개입하는 것도 옳지 않은 처사이지만 동시에 세속권력이 종교의 고유한 역할과 기능에 개입할 수 있도록 상황을 야기시키는 것도 교회의 중요한 책임이다. 물론 종교와 정치가 대상으로 하는 객체가 동일한 인간이기 때문에 서로를 완전히 분리할 수는 없지만 교권과 속권의 역할과 기능은 확실히 구분하여야 할 것이다. 이 양자의 한계를 확실히 구분하지 못하고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여 권력을 확대시키려고 했을 때 서로에게 혼란과 타락의 빌미를 제공하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배우고 있다.
사제가 되기 전까지는 사생활이 문란했던 바오로 3세 교황(1534~1549)은 교회 쇄신의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그는「머리의 개혁」을 중요시 하여 영성이 깊고 교회 쇄신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능력 있는 사람들을 추기경으로 임명하면서「개혁위원회」를 구성하여 그들로 하여금 교회 쇄신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도록 요청하였다. 이후 교회 쇄신운동이 계속 추진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이 개혁위원회의 추기경을 가운데 여러 명이 후에 교황으로 선출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직 매매, 자기 사목구를 떠나서 생활하는 주교문제, 합당한 준비없이 성직자가 되는 현상, 수도원의 세속화 등 교회 내의 여러 악폐를 열거하고 그 원인을 밝혔다. 그래서 교황은 이러한 악폐를 근절하기 위하여 교황청의 여러 기구를 개편하거나 신설하였다. 이 개혁위원회가 제시한 여러 가지 제안들이 후에 트리엔트 공의회의 중요한 의제로 채택되기도 하였다.
교회의 전통신앙을 순수하게 수호하여 이단의 오류를 밝히고 교회를 쇄신하며 터키인들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하여 서구의 제후들 간의 화평을 도모하면서 교회 대내외적으로 놓여 있는 문제들을 논의하기 위하여 바오로 3세 교황이 1536년 6월 2일 공의회 개최 교서를 발표하고 그 이듬해인 1537년 이탈리아 만또바(Mantova)에서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그러나 교권과 속권의 이해관계, 프랑소아 1세 프랑스 왕과 카알 5세 황제와의 주도권 다툼, 공의회 수위설 등 교회 내외의 여러 가지 상황 때문에 자주 연기되어 실제로 공의회를 개최하는 데 10여 년이나 기다려야 했다. 즉 프랑소아 1세는 독일이 정치, 종교적으로 분열하여 약해지기 바랐기 때문에 정치적 안정을 가져올 독일의 종교적 재통합을 원하지 않으면서 공의회를 통하여 카알 황제의 권력이 더욱 강화될 것을 우려하여 공의회 개최를 계속 방해하였다.
1544년 카알 5세가 프랑소아 1세 왕을 완전히 굴복시키고 1544년 9월 19일 크레피 강화조약을 맺고서 드디어 공의회가 열릴 수 있게 되었다. 이는 공의회가 보다 빨리 열릴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세속 권력의 세력 다툼이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공의회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계속되지 못하고 두 번이나 중단되어 결국 3회기로 나뉘어 끝낼 수 있었다. 회의 진행 방식은 먼저 신학전문위원회의에서 문제들을 심의하고 정리하여 전체회의에 제안하였다. 전체회의에서 그 제안을 토론하고 필요에 따라 수정을 요구하면, 신학전문위원회의 수정 요구대로 정리하여 다시 전체회의에 수정안을 회부하였다. 마지막으로 그 수정안이 전체회의의 요구대로 정리되었는지 심의하고 논의를 한 후에 찬반투표를 하였다.
1545년 12월 13일 트리엔트에서 역사적인 공의회가 열렸지만 회의 벽두부터 공의회의 최우선적인 의제를 선정하는 데 격렬한 논쟁으로 시간을 쏟아야 했다.
그의 종교적인 동기를 전혀 부인할 수 없지만 이제 카알 5세는 독일제국 내의 정치적인 안정을 위해서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와의 일치와 교회 개혁문제를 공의회의 최우선적인 과제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교황은 프로테스탄트 개혁운동의 근본적인 문제를 신앙과 교의의 확실한 규명으로부터 풀어나가려고 하였다. 왜냐하면 교황은 루터의 종교개혁을 비롯한 그리스도 교계의 혼란이 교회의 윤리도덕적인 타락보다는「다만 성서, 다만 신앙, 다만 은총」을 주장하며 정통적인 신앙과 신학을 거부하는 데서 더 심각하게 야기된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많은 논쟁 끝에 1546년 1월 22일 신학적인 문제와 함께 교회 개혁문제도 함께 다룰 것에 합의하였다. 이제 이 공의회의 초점은 이단자를 색출하여 교회 분열의 책임 소재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정통교리를 재확인하면서 무엇이 이단인가를 가려내는 문제에 맞추어져 있었다. 이는 공의회의 교령 중 어떠한 종교개혁가들의 이름도 거론되지 않은 데서도 알 수 있다. 따라서 프로테스탄트 측의 참가 여부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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