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6일 오후 2시、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에서는 이틀 전 교통사고로 선종한 한 평수사의 장례미사가 봉헌되고 있었다.
성당 안팎에 즐비하게 늘어선 조화들、사흘 밤낮 빈소를 지키며 땅을 치고 대성통곡한 지인들、강원도 옥계 산골짜기기와 전라도 광주 등 전국에서 어떻게 부음을 전해 들었는지 허겁지겁 모여든 사람들… .
아무튼 이 모든 광경들이 수도원의 장례 모습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무엇보다 조문객들과 수도회 식구들조차 고인의 삶에 대해 새롭게 놀라며 평소 개인적으로 알고 있던 것보다「더 큰 그릇」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기회였다.
최종명(라우렌시오) 수사.
1941년 5월 13일 충북 증원군 사척면 송강리에서 부친 최성환과 모친 양영순 사이에서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59년 12월 24일 소사성당에서 세례를 받고 60년 10월 20일 노기남 대주교로부터 견진성사를 받았다.
부모를 도와 농사를 짓다가 65년 9월 24일 수도회에 입회하고 67년 1월 6일 수련을 시작했다. 68년 1월 6일 첫 서원、72년 3월 21일 종신서원、93년 1월 6일 서원 은경축을 지냈다.
최 수사는 수도자이기 전에 농사꾼이었다. 수도회 입회 전부터 농사를 짓기 시작해 수도회 입회 후 죽는 날까지 농사 이 외의 다른 소임을 한 번도 맡은 바 없는 특이한 경력을 쌓았다.「기도와 농사」가 삶의 모두인 셈이었다.
「학위 없는 농학 박사」「농민의 희망」으로 농민들 사이에선 거침없이 불리워지던 최 수사였다. 단지 땅만 열심히 파는 평범한 농사꾼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최 수사는 30여 년 전부터 그저「힘든 일」로만 여겼졌던 농사일에「새로운 농법」「기술 도입」을 꾸준히 시도하며 농업에「경영」개념을 도입하는 등 과학영농을 추구해온 선각자였다.
그래서 일찍이 유기농법을 받아들이고 화훼 재배、바나나 스테비아(설탕풀) 신선초 같은 특수작물 재배、오이 방울토마도 멜론 등을 생산하고 최근에는「미생물 유기농법」 개발과 함께「조직 배양실」 운영하면서 종자가 귀한 난 재배에 성공했다.
특히 양질의 퇴비를 생산하고자 일본에서 도입한 지렁이를 양산、민간요법에 근거한「토룡」을 생산했고 지금까지 숱한 환자들에게 기적과도 같은 건강식품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물론 첨단영농을 위한 공부와 실험은 끝이없었고 최근에는 일본 유기농장을 견학하기도 했다. 또한 그동안의 공을 인정 받아 한국농업기술자협회로부터 상을 받기도 했다.
이렇듯 밤낮 없는 연구 성과가 빛날 수 있었음은 무엇보다 보급에 있었다. 최 수사는 각고의 노력 끝에 개발한 모든 영농법을 상품화하기도 전에 주변 농가와 찾아오는 농꾼들에게 또 지체 부자유인들에게 아낌없이 전수했다. 결국「재주는 최 수사가 넘고 돈은 주변 사람들이 버는」양상이 되고 만 것이다.
항상 농장 운영을 위한 자금난에 허덕이면서도、독자적인 상품화를 통해 많은 돈을 벌 수도 있었음에도 가난한 농민들을 먼저 생각하고 기득권을 포기한 수도자였다.
그래서 그의 장례식에는 유독 농민들이 많았고 그들이 가장 슬퍼했고 안타까워했다. 우루과이 라운드 협정 타결 농산물 개방에 직면한 한국 농업의 큰 버팀목이 사라진 아쉬움과 하찮은 농꾼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준「친구」의 죽음이 더없이 농민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최 수사는 뛰어난 친화력으로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와 사랑을 심어주는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로 그를 아는 사람들은 주저없이 평한다.
국민학교 4학년 중퇴인 그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박사이건 의사이건 농사꾼이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곧 그에게 동화됐고 그의 푸근한 인간성에 매료되고 말았다.
장례미사에 참례한 조문객 중 상당수가 비신자임이 밝혀져 최 수사의 종교를 초월하는 광범위한 교류가 새삼 그의 인간됨을 놀라게 했다.
또한 최 수사는 철저한 무소유의 정신으로 사랑을 실천해왔다. 농장 일을 하면서 생기는 모든 선물은 기증자 몰래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은 20년 넘은 바지를 입고 하루 두 끼를 찾아 먹기 힘들 만큼 바쁘고 가난하게 살았다. 결국 유품 정리를 한 후 조카들에게 주어진 것은 묵주와 성무일도 1권뿐이었다.
『누군가가 농민에게 희망을 주어야 한다. 내가 할 수 있으면 해야 한다』고 평소 입버릇처럼 말해온 최종명 수사.『3년만 더 살아 지도해 주었다면 기반을 잡을 수 있었을 텐데』하며 흐느끼는 농민들의 희망 최종명 수사는 6월 4일 대구에서 왜관 가는 국도상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선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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