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앞에 다가온 죽음을 절박하게 느끼며 예수께서는 몹시 혼란해하셨다. 죽음은 역시 그분을 공포에 몰아넣었고 정신마저 아찔한 위기감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사는 것을 최고로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이와 같은 죽음은 정말 억울한 죽음이다.
죽을 병에 걸려 병상에 누운 사람이라면, 혹은 평생을 살 대로 다 살고 늙어 죽는 사람이라면 죽음이 닥쳐도 자연의 순리로 또는 인생의 운명으로 태연히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은 순수 인간적으로 생각한다면 억울한 죽음이다. 그만큼 이 죽음을 맞는 당사자는 갈피를 잡기가 어려운 일이다.
『내가 지금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이 괴롭구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가닥을 잡을 수가 없구나』이 말씀은 예수의 적나라한 인간적인 심성을 나타내는 말씀이다. 절친한 친구 라자로의 죽음을 보시고 눈물을 흘렸을 때도 예수께서는 인간의 따뜻한 인정을 나타냈는데 죽음이란 예수님과 같은 초인간적인 성품도 누그러뜨리게 하는 사건인지도 모를 일이다.
예수께서 영원한 삶의 복음을 전파하려고 할 때 사탄은 예수께 먹을 것과 교만과 영예를 삶의 본령으로 제시하며 유혹했지만 실패했다. 이번에 마지막으로 사탄은 죽음을 목전에 둔 예수께 다가오고 있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감지하며 유혹을 물리치는 치열한 싸움을 하는 심전상태에 돌입하고 있다.
『아버지, 이 시간을 면하게 해주소서』. 이 말씀은 죽음을 면하게 해 달라는 약한 자의 부르짖음이다. 기도조차도 갈팡질팡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예수의 위대한 점은 이럴 때에 당신의 사명의식을 잃지 않는 데 있다. 그래서 정신을 가다듬는다.『아니, 나는 바로 이 고난의 시간을 겪으러 오지 않았는가. 아버지,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소서』.
『나는 행복하게 살기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났다』혹은『나는 정의롭게 살기 위하여 태어났다』라고 한다면 모든 사람이 살 힘을 얻겠지만『나는 고통받기 위하여 산다』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살 힘을 잃을 것이다. 그러나 행복과 정의가 우리를 배신하고 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니 행복한 삶과 정의로운 삶은 고통을 희생으로 바치는 삶을 통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이 이치는 논리적으로 납득되는 것이 아니고「나의 희생이 모든 사람의 행복을 가져다 준다」라는 종교적인 체험으로 이루어진다. 바로 이 신비로운 이치를 예수께서는 지금 깨우치려고 죽음을 맞이하고 계시는 것이다.『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소서』. 이 기도는『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이루어지소서』라고 호소하는 기도이다. 예수께서도 처음 설교를 시작한 때에 산상설교에서『하늘에 계신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소서.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소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하심으로 복음 전파를 시작하셨다. 이 기원이 바로「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소서」라는 기도와 일맥상통하는 기도이다.
이 기도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에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에도 강도 높게 말씀하신다.「거룩하신 아버지 나에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내가 이 사람들을 지켰습니다.…그 이름으로 이 사람들을 지켜주시고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이제 그 이름의 빛나심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써 이루어질 것이다.
그것은 예수의 애절한 기도의 응답으로 간주되며 그 일을 확증하는 표로 지금 죽기 전에 하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이미 내 영광을 드러냈고 앞으로도 드러내리라」. 예수의 세례 때에「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목소리가 하늘에서 들려왔고 변성용 때에도 같은 목소리를 제자들은 들었다(마르 9, 7).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며「모든 것이 이루어졌다」라고 외치며 몹시 만족해하셨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났기 때문이었다.
예수님과 하늘과의 대화는 사람들에게 각기 제 나름대로 들렸다. 예수께서 아버지께 기도하신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가 아버지의 파견자라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이었는데(요한 11, 42) 어떤 사람은 심판의 징후인 천둥소리로 들었고 어떤 사람은 천사의 목소리로 들었다.
그 목소리의 참뜻은 고난은 구원을 낳고 구원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뜻을 알아주기를 바랐다. 그래서 예수께서는「이것은 나에게 한 말이 아니고 너희에게 한 말이다」라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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