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테스탄트 개혁운동 결과,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는 1054년 가톨릭교회와 결별한 동방교회처럼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국가에 예속시켜 국가의 통제를 받는 소위「국가교회」를 형성함으로써「로마로부터의 해방」이 세속 권력에의 예속으로 귀착되었다. 그리고 초기 교회와 중세의 이단이나 1054년 동방교회의 대이교 사건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훨씬 더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다. 중세시대에 이슬람 교도들의「성전」으로 그리스도교 국가와 이슬람 국가로 유럽의 영토 핑계가 확정되었듯이 이제는 나라에 따라 종교가 구분되는 현상을 초래하였다. 영국, 에투아니아를 제외한 발틱해 연안 국가, 프랑스를 제외한 알프스 이북 북유럽의 대부분의 국가들이 프로테스탄트 교회로 넘어갔다. 이렇게 국가에 따라 종교적인 분포가 확정되면서 종교적인 바탕 위에서 일치되었던 유럽의 정치적인 일치가 무너져 버렸다. 금세기에 이르러 유럽의 여러 나라가 국가연합으로서의 일치를 모색하고 있지만 그 동기와 목표는 국제 정치 사회에서 확고한 위치를 확보하고 정제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각국의 실질적인 이익이 상충될 때에는 예측할 수 없는 결과가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국가와 민족을 초월한 종교와 높은 도덕적인 가치를 바탕으로 하는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국수주의적인 국가 이기주의로 말미암아 쉽게 무너져 버릴 수 있을 것이다. 보편적인 가치에 바탕을 두지 않는 관계는 개별적인 이익의 상충으로 언제든지 깨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관계에서도 상대방의 이용 가치에 따라 선택될 때, 그 이용 가치가 소멸되면 그 인간관계가 쉽게 무너져버리는 경우가 비슷하다.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부분의 전쟁도 결국 도덕적인 가치를 바탕으로 하는 세계 공동체 건설보다는 국가 이기주의와 지배욕에서 더 쉽게 촉발되고 있다.
프로테스탄트 개혁운동의 결과로써 근대 자본주의를 촉진시켰다고 평가하는 학자들도 있다. 특히 각자에게 맡겨진 사명을 강조한 칼빈이 자기 신자들이 그들에게 맡겨진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도록 강조했고 엄격한 도덕관에 따라 오락을 금지하고 소비를 제한하면서 자본을 축적하도록 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어떤 학자들은 프로테스탄트 개혁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인간의 존엄성을 부각시키고 개개인의 활동을 최대한으로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1400년대 르네상스시대부터, 혹은 르네상스 이전부터 이미 태동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개혁운동의 결과가 근대 자본주의 형성에 간접적으로라도 기여했다고 본다. 그 이전에 이미 태동되었다 할지라도 프로테스탄트 운동이 자본주의를 촉진시켰다고 도 한다. 가톨릭교회가 다양한 사회 계층의 조화를 모색하고 덜 가진 자들을 옹호하면서 더 많이 가진자들에게 무제한적인 자본 축적을 자제하도록 촉구하였고, 프로테스탄트는 이 세상의 성공과 출세를 하느님의 축복과 직결시키면서 경제활동에 있어서 모든 제한을 제거했다고 한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프로테스탄티즘을 본질적으로 자본가의 종교라고 정의하였다. 사실 이 세상의 출세와 성공이 반드시 하느님의 축복이고 가난하고 실패한 사람이 바로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 가톨릭 가르침이다. 프로테스탄트 개혁운동은 신자들의 영적 생활을 활성화시키고 하느님의 말씀을 자주 읽고 말씀을 실천케 하는 데 많은 결실을 가져온 것도 사실이다. 이미 가톨릭 쇄신운동이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그 운동을 더욱 촉진시키는 데 간접적으로라도 영향을 끼친 것도 긍정적인 평가로 볼 수 있겠다.
신앙의 고귀한 유산은 상대방을 증오하는 분열이 아니라 사랑과 화해로 서로를 용서하고 섬기는 일치이어야 한다.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설파하는 세계적인 종교들의 발상지인 예루살렘이 세계적인 전쟁의 화약고가 된 현실은 실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종교가 인간의 삶을 정화하며 궁극적인 구원에로 인도하는 사명을 수행하기보다는 국가라는 집단이기주의를 추구하는 데 필요한 겉치레의 도구일 뿐인가?
4백70여년 전, 사랑 안에서 일치를 당부하시며 이를 위해서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서로를 단죄하고 저주하며 잔인한 전쟁까지 불사했던 종교개혁운동으로 인한 비극적인 결과를 우리는 당연한 것처럼 고스란히「유산」으로 받아들였다. 4백70여년 전 그리스도 그분이 누구인지 우리가 알기도 전에,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의 반대편에서 일어났던 종교개혁의 결과인 분열을 왜 우리도 당연한 현실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종파를 떠나서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에 충실한 제자라면 터무니없는 불신의 묵은 감정과 선입견을 버리고 서로를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구체적으로 시도해야 할 것이다.
가톨릭의 아주 훌륭한 사람과 프로테스탄트의 못된 사람과 비교하여 전체를 평가하는 편협한 선입관도 일치를 저해하는 자세다. 서로가 진심으로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한 형제라는 마음으로 일치하려는 적극적인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서방교회의 일치운동의 결과만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양 교회에서 구체적인 일치운동을 벌여 세계 교회에 자극을 줄 수도 있겠다.
종교개혁운동으로 분열된 이후 양 교회는 이제까지 서로를 용서하며 받아들여 일치하려는 진솔한 노력을 기울이기보다는 서로를 단죄하며 저주하는 비복음적인 투쟁에 더 익숙해 있었다. 다행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양 교회가 일치를 위한 대화를 다시 시작한 것은 참으로 하느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요한 18,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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