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하느님의 거룩한「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상황이다. 이런 곤궁스런 상황이 예수의 제자들로 하여금 기도하도록 가르친다. 이 같은 힘든 상황이 실제로 얼마나 심각한지 그리고 하느님의 뜻이 세상에서 그 얼마나 드물게 실현되는지는 하느님의 본래의 뜻을 아는 자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이ㆍ간청은 예수를 통해서 하느님의 뜻이 선포되고 해석됨이 전제되고 있다.
마태오의 주의 기도문에서 (6、10b) 이 간청은 역시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바람(원의)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루가의 주의 기도문에서는 이 간청이 빠졌다.
◆실현돼야 할「하느님 뜻」
루가는 왜 이 간청을 빠뜨렸을까? 하느님 나라를 큰 보화로 발견하고 그분의 나라가 오기를 기도하는 자는 더 이상 다른 새로운 것을 청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일까? 그러나 그 누가 감히 의도적으로 빠뜨릴 수 있었을까! 여기서「하느님의 뜻」을 드러나게 언급한 것은 어떤 특별한 관심에서였을 것이다. 즉 인간은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도록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크게 강조되고 있다.「하느님의 뜻」은 예수에게 대단히 중대한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의 일생을 지배한 정신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그것은 곧「하느님의 뜻」이었을 것이다.『보소서, 하느님! 저는 당신 뜻을 행하러 왔습니다』(히브리 10、7). 또『내 음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고 그이의 일을 이루는 것입니다』(요한 4, 31~34).
예수의 모국어에서「뜻」이란 우리말에서 보다 더 깊은 의미와 내용을 지니고 있다. 하느님의 뜻은 하느님이 무시로부터 원하신 것、계획하신 것、그분의「마음에 드신 것」을 실현하고 성취시킴에 그분이 기쁨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그분의 마음에 드는 것을 청하는 것을 잊거나 빠뜨려서는 안 된다.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이 완성되어야 할 기준을「하늘」에 두었다고 하여 너무 좁게 생각해서도 안 된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고 받드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 위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실행해야 하는 전체 과제 중에서 언제나 다만 작은 부분일 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기도하는 자는 조심스럽게 오직 그의 바람을 표현하고 있다. 하느님께서 친히 이 일을 시작하시고 그분의「마음에 드는 것」을 성취하시기를!
◆구원 계획과 통치 의지
하느님의「마음에 드심」은 (1)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완성되는 것이고 (2)하느님의 통치 의지가 실행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실현되기를 바라면서 기도해야 한다. 그분의 통치는 그분의 구원 행위 안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다.
①「하늘」에서는 무엇보다 첫째 하느님이 원하신 상태가 이미 실현되었다. 아직 세상에서 실현되어야 할 것이 그곳에서는 이미 완성된 것이다. 여기서「이루어지기를」비는 하느님의 뜻은 하느님의「마음에 드는 것」이 영원으로부터 예정된 완성상태에로 이끌어짐을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제자들은 하느님의 뜻이 실제가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하느님 통치가 우리 세상에서도 성취되었을 때「하늘에서와 같이」세상에서 실현될 것이다.
②하느님이 세상에서 당신의 결정적인 구원 행위를 이미 시작했음을 아는 자는 이제 여기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완전히 이루어지기를 기도할 것이다. 하느님의 구원 의지는 이미 예수시대에서부터 세상에서 이루어져가고 있다. 예컨데 아버지께서「하늘나라」를 위해서 선택하신 가난하고 보잘 것 없이 보이는 제자들,『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여러분 아버지의 뜻이 아닙니다』(마태오 18、14)고 예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신다. 그래서 그리스도는『슬기롭고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 같은 사람들에게 계시』(마태오 11、26)하신다. 하느님의 영광은 그분의 구원 행위 안에서 계시된다. 그러나 그분의 구원 계획이 하느님의 결정적인 구원 행위 안에서 창조와 더불어 실현되면、천상적 상태가 이 세상에서 실제가 되면、지금 이미 하늘에서처럼 세상에서도 되어진다면 하느님의「마음에 드는 바」가、즉 그분의「뜻」이 세상에서 완전히 이루어진 것이다.
◆「동심」을 원하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은 아주 구체적으로「회심」(마르코 1、14 이하)이다:『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십시오』. 복음은 기쁜 소식이다. 그것은 첫째 예수께 대한 믿음의 고백이요、예수의 말씀 안에서 하느님의 요구의 계시에 대한 순종적인 경청인 것이다. 하느님의 뜻은 우선 예수를 하느님의 뜻의 최종적인 해석자로서 인정하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루가 6、46、47 이하 참조). 「하느님의 뜻을 실천한」세리들과 죄인들은 보속하며 예수께로 모여든 이제 예수의 가족이 되었다:『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자매이며 어머니입니다』(마르코 3、35).
이와 같이 여기서 하느님의 뜻은 그분의 완전한 절대성 안에서 보아야 한다. 하늘과 땅을 포괄해야 한다. 이것이 곧 기도하는 자의 큰 바람이다. 많은 이가「하늘과 땅」을 단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혹은 이루어져야 할 장소만으로 본다. 그러나 여기서「하늘」은 완성된 하느님의 뜻만이 절대적으로 유효한 곳이다. 땅도 역시 완성에 이른 하느님의 구원 계획과 통치 의지가 인정되는 곳이다.
◆「하늘과 땅」=「온 세상」
「하늘과 땅」은「온 세상」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표현이다. 온 세상에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기도의 테마는 세상 안에서 실현되어야 하는 하느님의 뜻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고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기만을 간청한다면 그 기도는 다만 추상적이거나 잘못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세상을 등지고 하느님께로만 향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세 번째의 간청이 이를 완전히 불가능하게 만든다. 기도하는 사람은 세상 때문에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하는 사람은「하느님과 세상이 한 호흡 안에서」함께 머물도록(GㆍEbeling) 훈련을 하는 것이다.
◆「하느님 뜻」에의 순종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또 생 한가운데서 하느님의 뜻을 알고 실행해야 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은 어렵다. 우리 세상과 하느님의 뜻을 단숨에 말하는 것은 쉽지 않다. 더욱이 우리 삶의 개별적인 상황들 안으로 들어가거나 구체화시킨다면 그것 역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신앙 안에서 또 하느님의 빛 안에서 하느님의 빛으로 모든 것을 보도록 해야 하며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도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려면 십자가를 만나게 된다. 하느님께 대한 진정한 사랑을 가진 자만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실천할 수 있다. 하느님께 사랑으로 내 자신을 내맡기며 신뢰하고 또 나 자신을 비울수록 하느님의 뜻을 위해 나는 자유로와진다. 하느님의 뜻에 기꺼이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축복은 깊은 내적 평화와 기쁨 그리고 자유이다.
예수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생애가 이 세상에서 가장 풍부하고 가장 완전하고 가장 단순한 생애임을 보여주셨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이며 하느님 지배이다.
◆이웃 사랑=하느님 사랑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통과 괴로움의 이유를 하느님의 뜻에 탓을 돌린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교적이라 할 수 없다. 무조건 모든 사건들을 하느님과 연관을 시키거나 인간이 책임져야 할 것까지도 하느님의 뜻에 미룬다면 그것은 눈 먼 운명적 신앙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꼭두각시가 아니다. 그러면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가? 하느님의 뜻은『네 온 마음으로、네 온 영혼으로、네 온 정신으로 너의 하느님이신 주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마태오 22、37~39)이다.
◆사랑의 계명
우리는 여기서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사랑이란 초자연적인 느낌이 아니라 느낌、이성、행동하는 삶、모든 뜻과 노력을 포함한 인간 전체를 뜻하는 자세를 말하고 있다.
(2)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게 대한 사랑은 하나이다. 이웃 사랑이 없는 하느님 사랑은 있을 수 없다. 이웃 사랑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할 때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이 진실한 사랑이 된다.
(3)자기 자신과 문제가 없는 사람이라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이 길을 가로막고 서 있거나、자기 자신을 미워하거나、자기 자신에게 자유롭지 못하거나、자기 자신과의 끊임없는 격투 속에서 살고 있다면 그는 다른 이와 함께 결코 평화롭게 지낼 수 없다. 우리가 하느님을、이웃을 그리고 우리 자신을 한「호흡」안에서 사랑하는 것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져야 할 하느님의 뜻이다.
◆사랑 없으면 죽은 생명
하느님 사랑을 위해 이웃 사랑을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하느님과 만나지 못한 것이고 자기 기만이다.『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장이입니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1 요한 4、20). 마태오 25、31~46에서 보는 것처럼 예수는 이웃에게 선행을 베푼 이들을 하늘나라로 데려가 함께 살겠다고 약속하셨다. 즉 이웃에게 베푼 것을 바로 당신 자신에게 행한 것으로 간주하셨다. 하느님은 사람들 안에 계신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사람 안에서 특히 가난하고 병들고 약하고 고통 당하는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을 찾고 또한 만날 수 있어야 한다.
하느님은 인간을 인간되게 하신다. 인간에게 성실함은 하느님께 성실함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어졌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은 사랑이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사랑하지 않으면 죽은 것이다.『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물러 있고 하느님도 그 사람 안에 머물러 계십니다』(1 요한 4、16b).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하느님을 더욱 더 닮게 된다.
◆내 이웃은 누구인가?
바로 내 곁에 있는 사람이 내 이웃이다.「이웃」이라는 말 자체가 바로 가까이 있는 사람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만나는 사람이면 누구나 내 이웃이다. 예수는 내 이웃만이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셨다(마태오 5、44~48 참조). 예수가 말씀한 가장 근본적인 사랑의 근거는 모든 존재의 뿌리요 바탕이신 하느님께 있다. 사랑은 하느님의 것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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