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르뜨르를 떠나 북쪽으로 길을 떠나 에브뢰를 지나면서 N13번 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곳은 사과를 주정으로 하는 브랜디의 대명사인 깔바도스로 유명한 고장이다.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소설 개선문에서 주인공들이 즐겨 마시던 술, 라비끄와 조앙 두 연인의 쓸쓸한 어깨와 가난한 가슴들을 훈훈히 덮혀주던 술. 어른이 되면 제일 먼저 마셔보고 싶은 술이었던 깔바도스의 지방도로를 따라 시간 반을 더 나아가자 비릿한 바다 내음이 풍겨왔다. 노르망디 해안이 가까이 다가온 것이다.
1944년 6월 6일 여명과 함께, 수십만의 젊은 영혼이 불칼의 휘장을 어깨에 두르고 파시즘의 압제에 신음하는 유럽을 구하기 위하여 폭풍우 거센 바다로부터 그 이름마저 생소한 미국식 암호명의 해안가로 뛰어들어왔다. 유타, 오마하, 고울드, 주노, 스워드라는 그때까지만 해도 이름 없는 모래밭은 진격군의 거룩한 피로 적시어졌다. 수천의 꽃다운 젊음이 하룻동안 주검으로 쌓이면서 유럽 해방의 길을 열었던 것이다.
◆현대 자유민의 성지
인류는 그로부터 꼭 만 50년이라는 세월을 지난다. 이 고귀한 희생 없이 오늘의 세계에 자유와 민주의 꽃이 피었겠는가? 학창 시절 한동안 깊이 빠져있던 전쟁사 연구를 통하여 나는 이 노르망디의 해안이야말로 20세기 전세계 자유민을 상징하는 성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노르망디 해안에 빨리 서고 싶은 마음에서 돌아오는 길에 캉(Caen)을 보기로 하고 바이유(Bayeux) 쪽으로 차를 몰았다. 바이유는 노르망디 전쟁 박물관과 노르망디의 영웅 윌리암 정복왕(Wiliam the Con-queror)의 영국 정복 장면을 자수로 묘사한 (월리엄의 부인 마틸다의 솜씨로 전해내려오는) 길이 70여 미터의 타피스트리가 소장되어 있는 미술관으로도 유명하지만 내가 이곳을 찾는 이유는 오마하 해변으로 나아가기 위함이다.
해안에 서서 영국 해협에서 불어오는 거친 파도를 맞노라면 갖가지 상념이 스쳐 지나간다. 전설적인 종군 사진 작가인 로버트 카파가 노르망디 상륙 전의 귀중한 사진 열 장을 남긴 곳도 바로 이곳이다.
미 제1사단 16연대와 동행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총 대신 카메라를 휘둘렀던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젊은 시절의 우상으로 내 마음 속 깊숙히 어딘가에 있는 망각의 창고 속에 먼지 쌓인 채 감추어져 있었다. 스페인 내란에서 총을 맞고 뒤로 넘어지는 공화파 병사의 사진으로 일약 세계적인 종군 작가로 인정 받은 그는 동쪽의 피가 반쯤 섞인 헝가리인이었다.
프랑코군이 승리하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앙드레말로와 함께 프랑스로 철수하는 길에서의 끔찍한 사건…, 그가 몸 담았던 공화국의 탱크에 치어 눈 앞에서 죽어간 사랑하는 아내의 기억을 못내 지우지 못하고 내내 독신으로 전쟁터의 삶과 죽음의 순간 사이를 헤매었던 그는 결국 디엔비엔푸의 격렬한 포화 속에서 지뢰와 함께 산화하여 영원히 사진 하는 이들의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초상을 남겼다.
최후의 심판 때 이곳에서 살아 남은 자와 죽은 이들 모두가 다시 만나리라고 속으로 되뇌이며 한동안 그렇게 해변의 쓸쓸함과 침묵으로 마주하고 있었다. 돌아서는 길에 흐린 하늘 끝 한 자락이 살짝 들추어져 푸른 색이 구름 뒤로 보이고 이내 한 묶음의 햇살이 사라져간 전장의 상처를 위로하듯 스잔한 언덕과 바닷가 모래톱 발치에서 부서지는 파도를 한동안 비추더니 이내 다시 사라져 버렸다.
◆전흔 위로하는 파도
오던 길을 되짚어 캉에 들러 윌리엄 정복왕이 세운 생티엔(St. Etie-nne, 1068-1120) 성당을 순례하고 싶었지만 해 지기 전에 몽생미쉘(대천사 미카엘의 산이라는 뜻)까지 가야하겠기에 시내로 차를 몰아 시청 옆에 키 큰 남자처럼 우뚝 서 있는 고딕 건축의 초기 양식의 겉모습만 훔쳐보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캉을 벗어나자 노르망디 반도를 서남쪽으로 횡단 렌느(Rennes) 방향으로 내려간다. 아브랑슈(Avranches)를 지나 약 20km를 더 가노라면 풍토르송이라는 작은 마을이 나오는데 몽생미쉘은 이곳에서 다시 북쪽 바닷가로 꺾어 들어가야 한다.
몽생미쉘은 갑자기 신기루처럼 나타난다. 마치 숲의 여왕처럼, 고딕의 상징처럼, 자연과 건축의 바닷가에 떠 있는 완벽한 조화는 이와 같이 한 덩어리가 되어 일치를 이루는 것이라고 외치고 있는 것처럼 우리 앞에 홀연히 모습을 드러내보이는 것이다. 라스트 콘서트라는 눈물 쥐어짜는 2류 영화조차도 그 나름대로 사람들의 뇌리에서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는 이유가 있다면 아마도 첫 장면의 인상-청순미의 아릿다운 소녀 등 뒤로 보이는 몽생미쉘의 독특한 분위기 때문이 아닐까?
수평선 위로 1백52m나 치솟아 있는 고딕의 첨탑과 똥브산(Mont Tombe, 기원 전 이곳은 셀틱인들의 바닷가 무덤이었다)의 절묘한 조화는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기가 힘든 것이다. 게다가 만조 때 이곳을 순식간에 섬으로 만들어버리는 유럽 제일의 간만의 차(15m)는 하고 많은 먼 옛날의 사연들을 불러와 가슴 설레이는 전설을 만들기에 충분한 여건을 갖추고 있는 곳이다.
몽생미쉘의 높은 첨탑 끝에는 금박 입힌 미카엘 대천사가 창을 들고 용을 무찌르는 모습을 만든 조상이 올려져 있다. 708년 아브량슈의 오베르주교는『대천사 미카엘이 꿈에 나타나 무덤산 꼭대기에 교회를 지으라고 말한 것』을 그대로 실행에 옮겼다.
966년 노르망디공 리차드 1세는 몽생미쉘을 베네딕도 수도원의 기도와 교육의 장으로 바꾸어 놓았으나 곧 이곳은 수도원장과 왕의 주둔병이 보호하는 교회의 요새로 탈바꿈하였다. 15세기 백년전쟁 때 영국은 이 산성을 세 차례나 포위 공격을 하였으나 프랑스 북부에서 유일하게 함락되지 않은 미카엘 대천사가 수호하는 난공불락의 요새라는 신화를 남기게 되었다.
이러한 연유로 묵상과 교육의 장은 권력형의 성직자들에 의하여 점차 폐쇄된 성채로 둔갑되기 시작하였다. 프랑스 혁명 기간과 제정 나폴레옹 시기에는 정치범의 감옥으로 그 후에는 일반 잡범들의 감옥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몽생미쉘이 오늘의 모습을 되찾은 것은 1872년 재건 계획이 이루어진 다음의 일이었다.
◆금박 입힌 미카엘 상
수도자가 다시 이곳에 들어온 것도 최근의 일로서 사반 세기 전인 1969년의 일이다. 이 섬 아닌 섬에는 지금 불과 1백20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해마다 몰려드는 관광객들이 사실상의 주인인 셈이다. 육지와 이어지는 연육교가 세워진 것은 몽생미쉘을 재건하기 시작한 1879년으로 처음에는 철길을 놓을 계획이 있었다고 한다. 성 미카엘 성당으로 올라가는 층계길 또한 아주 옛날에는 없었다. 기록에 의하면 6명의 죄수들이 발로 밟아 돌리는 기중기로 모든 물자와 인원들이 요새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입구에서 80m 정도를 걸어 올라가서 만나게 되는 성 미카엘 성당의 출입구는 진입 정면에서 보아 좌측인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건물은 중세의 여러 양식이 혼재되어 있는 모습을 지니고 있는데 외관은 초기 고딕식이며 내부는 후기 로마네스크 양식의 특징인 원형 볼트와 교차 궁륭, 연속 아케이드의 소박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반면에 성가대 부분은 15세기 후반의 불꽃 장식이 첨가된 플랑부아양 고딕(Flamboyancegothic) 양식으로 되어 있다.
◆한때 감옥으로 사용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성 미카엘 성당 바로 옆에 좁디 좁은 산정을 비집고 들어선 수도원에 회랑이 있는 중정이 있는 것을 보고 놀란다. 이 척박한 산정에서도 뜰을 거니는 유유자적함을 맛 보려는 옛 사람들의 유장한 모습과 지혜가 부럽기만 하다.
회랑 옆에는 내부 천정이 성당 회중석 청정과 마찬가지로 나무로 집성된 궁형의 볼트(Vault)로 되어 있는 유명한 수도원 식당이 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수도원의 식당을 떠오르게 하는 이 방은 정말 중세의 시간이 그대로 정지한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바닥의 모자이크와 천정을 가로지르는 등걸이 횃대는 나중에 다시 한 것이겠지만 오래된 방의 분위기를 결코 해치지 않는다.
◆절대신앙의 창조물
밑에서부터 실을 만들고 그 위의 지붕 바닥을 이용하여 성당 앞 마당을 만든 것을 보면 그 당시 사람들이 성당 앞의 광장을 얼마나 중요시했는가를 알 수 있다. 중세의 건축가 시떼는 성당 앞 광장의 길이는 성당 정면 높이의 2배가 이상적인 치수이며 적어도 1백 만큼의 길이는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 어려운 환경에서 수 세기를 걸쳐 자연과 완벽한 조화를 일구어낸 그 힘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절대정신과 절대신앙의 힘으로만 가능했을 몽생미쉘은 한여름 밤에 보면 정말 꿈처럼 환상적이다. 1천3백 년 전 한 성직자의 꿈이 일구어낸 또 하나의 꿈처럼 몽생미쉘은 셀틱과 노르망의 거친 바다 위에 신앙의 보루처럼 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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