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내성지 전경.
김대건 신부 경당을 나서니 성지의 넓은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성지의 건물과 산 등의 조경이 어우러지는 모습이 가히 장관이다. 교구 설정 당시 미리내성지의 모습을 기억하는 이라면 이 모습에 상전벽해를 실감할지도 모르겠다. 성지가 개발되기 전에는 김대건 신부의 묘소와 경당 외에는 미리내성당까지 이어지는 작은 길이 있었을 뿐이었다.
초대교구장 윤공희 대주교는 ‘초대교구장 윤공희 대주교에게 듣는다’를 통해 “미리내성지는 한국교회 첫 사제 김대건 신부님의 유해를 모신 묘소이지만 당시 성지 시설로는 경당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면서 “순교자현양대회 때는 경당부터 묘소까지 행렬이 길게 끊임없이 이어져야 하는데, 중간에 조그마한 개울이 하나 있어서 행렬이 자꾸 끊어지는 어려움도 겪었다”고 회고했다.
성지 옆길로 올라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모원에 서니 성지의 전경이 내려다보였다. 성지 개발은 바로 수도회의 설립을 통해 이뤄졌다. 2대 교구장 김남수 주교는 성지에 수도회를 초빙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외국의 유명한 성지들처럼 수도회가 성지에 머물면서 성지의 효율적인 개발과 관리를 위해 활동해 줄 수 있을 것이라 여긴 것이다. 이에 김 주교는 수도회 설립을 준비하던 정행만 신부에게 교구 내에 수도회 창설을 허가하면서 미리내에 부지를 마련하도록 했다. 이윽고 1976년 미리내천주성삼성직수도회,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가 설립됐고 공소로 전락했던 미리내본당도 부활할 수 있었다.
마침 1976년은 김대건 신부 순교 130주년을 맞는 해였다. 교구는 미리내성지 순교자현양대회를 전국 규모로 성대하게 열었다. 한국뿐 아니라 그 무렵 아시아주교회의에 참석했던 주교들도 참례했다.
이때 성지에 큰 광장을 마련했고, 전기와 전화를 연결하고 도로도 보수했다. 1979년에는 국도에서 성지로 들어가는 도로가 확장되기도 했다. 이후 2005년까지 수도회는 성지를 개발해 순례자들이 머물고 기도하기 좋은 성지로 가꿔나갔다. 1980년에는 옥외 십자가의 길을, 1991년에는 한국순교자103위시성기념성당을 봉헌했다.
성지를 지켜내기 위한 교구의 노력도 이어졌다. 2000년에는 성지지역 안으로 고압송전탑을 설치하려는 계획에 반대해 궐기대회, 미사봉헌 등을 진행했다. 또 2008년에는 성지 인근에 골프장이 건설되는 움직임을 막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성지 밖으로 나서는 길에 커다란 순교성인복자상이 눈에 들어왔다. 너비 23m, 높이 5.5m 크기의 상에는 오직 하늘나라만을 바라봤던 103위 성인, 124위 복자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성지는 2015년에 이 상을 세우고 광장을 새롭게 조성하는 등 교구 순교자 현양의 첫 단추인 성지를 앞으로도 신자들의 순교신심을 고양시키는 곳으로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다.
미리내성지 입구 한국순교성인복자상.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