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여러 차례 보았듯이 대부분의 역사적 사건은 갑자기 혹은 우연적으로 일어나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1534년에 영국 교회가 로마 가톨릭교회와 단절한 불행한 사건은 단순히 헨리 8세의 개인적인 정욕이나 그의 주도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이미 1300년 말부터 분열의 조짐이 시작되어 진행되어온 과정의 마지막 순서로 해석하는 사가도 있다.
1400년과 1500년도 초의 영국 교회의 상황을 살펴보면 두 가지의 상반된 면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긍정적인 면으로서, 일반적으로 신자들이 제반 신심생활에 열심했다는 점이다. 주간의 평일미사의 참석자도 많았고 성모신심도 깊었다고 한다. 그리고 특히 씨토회나 프란치스코회처럼 수많은 수도회에서 그들의 수도 규칙을 열심히 준수하며 토마스 모어 등 훌륭한 인문주의자들의 활동도 지나칠 수 없는 면이다.
부정적인 면으로는 반 교회적인 분위기가 증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교회의 완전한 청빈생활을 요구하고 교제제도를 거부하며 교회와 결별한 위클리프(1320~1384)의 제자들이 계속적으로 전파하고 있는 교리의 영향도 적지 않았다. 일반 대중은 가난한 수도자들을 존경하면서 동시에 일부 교구청의 과세 정책과 하급 성직자들의 무식으로 인해 성직자들을 점점 멸시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정치적인 흐름에 따라 영국에서도 민족주의적인 독립정신이 팽배해가면서 이와 맞추어 종교적인 면에서도 자치교회 혹은 국가교회 정신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유럽 대륙에서의 영토 확장을 포기하고 유럽 밖에서 식민지 확장과 교역으로 영국의 이익을 추구하려 하였다. 정치 경제적인 측면에서 구대륙과의 분리가 종교적인 면에서 로마와의 분리로 연결된 것은 우연이 아니나. 오늘날도 유럽 대륙의 주도권 문제가 일어날 때 영국의 입장을 보면 역사적인 흐름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헨리 8세(Henry, 1509~1547)는 루터의「교회의 바빌론 유폐」에 대하여「칠성사의 옹호」라는 반박서를 써서 레오 10세 교황(1513~1521)으로부터「신앙의 옹호자」란 칭호까지 받았다. 그러나 그의 이혼문제로 교황과 불화하게 되었다. 아라곤 왕의 딸이요 카알 5세 황제의 숙모인 가타리나는 15세 때, 1501~1502년 4개월간 헨리의 형이요 왕위 계승권자인 14세의 아아더와 결혼생활을 했었는데, 아아더는 이미 중병을 앓고 있다가 곧 사망하였다.
1503년 가타리나는 정치적인 이유에서 교황으로부터 인족장애 면제를 받은 다음 겨우 12세인 헨리와 약혼하게 되었다. 헨리가 즉위한 후 1509년 결혼식을 올리고 18년 동안의 결혼생활에서 3명의 아들을 포함하여 7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 후 여왕이 된 메리(Mary, 1553~1558)를 제외하고는 모두 어려서 죽었다.
헨리왕이 가타리나와 이혼하고자 한 직접적인 동기는 궁녀인 앤 볼레인(Ann Bo-leyn)과의 연정관계로 많은 이들이 보고 있지만 그러나 왕위 계승권을 가진 후사문제도 하나의 큰 동기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궁녀와의 관계가 개인적인 문제라면, 후사문제는 왕가의 국사라고 볼 수 있다. 이미 왕위 계승권 문제 때문에 19년 간이라는 대혼란을 겪은 이후라 왕자가 탄생하는 것이 최선책으로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는 앤과 결혼하기 위하여 가타리나와의 결혼을 무효화하기로 하고 교황에게 혼인 무효를 신청하였다. 왕은 자기에게 유리한 판결이 나도록 각국의 유명한 대학 교수들을 동원하여 그들의 지지를 받았으나 1531년 끌레멘스 7세 교황(Clemens, 1523~1534)은 왕의 가타리나와의 결혼이 유효함을 선언하고 왕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그러자 왕은 교황과의 단절을 결심하고 전통적으로 반 로마적인 의회의 권한과 왕에 대한 영국 성직자들의 충성심을 이용하여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뜻을 적극 지지하도록 계획을 세웠다.
그의 총리대신인 토마스 모어가 동조하지 않자 볼레인가와 가까운 토마스 크렌머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하였다. 그는 1533년 1월 헨리왕을 앤과 비밀리에 결혼시켰다.
이어 1533널 5월 23일 가타리나와의 결혼을 무효로 선언하였다. 1533년 7월 11일 교황은 9월까지 기간을 주면서 왕에게 앤과의 결혼을 취소하도록 요청하였지만 거부하여 1534년 7월 헨리와 앤과 크렌머에게 각각 파문이 내려졌다.
이에 대응하여 1543년 11월 3일 영국 왕이 이제부터 교황을 대신하여 영국 교회의 최고의 권위를 가진다는 수장령이 의회에 의해 법률로 선포됨으로써 로마 교황과의 단절이 확정되었다. 이로써 영국의 모든 관리와 성직자들은 왕을 영국 교회의 최고의 권위자로 인정한다는 선서를 해야 했고 이를 거부하면 대역죄로 처벌되었다. 카르투지오 수도자들을 위시하여 많은 수도자들과 신자들이 왕의 명을 따르지 않음으로 처형되었지만 대부분의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왕의 의도대로 선서한 것은 영국의 국가교회에 대한 의식이 이미 싹 트고 있었음을 확인해 준다. 약 2백 명이 처형되면서 1540년까지 9백50여개의 수도원이 폐지되었다. 헨리왕은 그 후에도 여섯 번째 결혼하였지만 왕에 의해 참수 처형되거나 이혼되거나 일찍 죽음으로써 어떠한 결혼도 성공적으로 끝내지 못하였다.
헨리 8세의 결혼과 이혼문제는 정치적인 복잡한 요소와 개인적인 욕망이 개입되어 있었다. 가타리나와 헨리와의 결혼이나 그 결혼의 유효성 확인에 있어서 교회 측의 정치적 배려가 전혀 없다고 볼 수는 없다. 또 헨리왕의 로마 교황과의 단절은 토마스 모어의 마지막 말처럼「하느님의 법과 거룩한 교회를 직접적으로 거부」 한 것으로 어떠한 이유로도 합리화될 수 없다고 본다. 일시적인 이익과 체면 때문에 문제의 본질적인 요소를 외면하고 부차적인 일에 집착함으로써 얼마나 중대한 과오를 초래하는지 역사는 우리에게 되풀이하여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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