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나라』라는 개념은 이미 구약시대에 형성되었다. 그들은 하느님이 이 세상의 주인이시며 따라서 언젠가는 고통에 찬 이 세상에 나타나셔서 불의 고통 불행을 없애 주리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이 기다림은 여러 형태로 나타났고 종종 불순하고 저속한 것도 많았다. 그들은 하느님의 통치를 실제로 이방인의 제압이나 민족 부흥、또는 하느님이 직접 다스리는 국가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예수와 더불어 나타난 하느님의 나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예수는「세상의 종말」이 하느님 나라가 처음으로 나타나는 것과 일치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회개하시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예수의 메시지는 어떤 외적인 사건이 아니라「하느님의 지배」에 강하게 집중되어 있다. 이것은 예수의 메시지의 가장 두드러진 요소이다. 즉 하느님의 통치、지배가 이미 시작했음을 알리고 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예수의 업적과 설교 안에 있다(루가 10、23~24 참조)
예수는 또『조심하고 깨어있으십시오. 여러분은 그때가 언제 이를지 모릅니다』(마르코 14、33)고 말씀하시고 정확한 날짜를 묻는 이들에게『하느님 나라는 눈에 보이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또「여기 있다、저기 있다」 할 수 없습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나라는 여러분 가운데 있습니다』 (루가 17、20-21)고 대답하셨다.
◆모든 구약들의 완성
하느님 나라가 오기를 열망하는 것은 예수의 선포 안에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전한 소식처럼 그의 기도 안에서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하느님의 왕국、그분의 통치、그분의 나라가 온다는 예수의 소식은 두말할 나위 없이 그분의 복음 선포의 핵심인 것이다:『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습니다. 여러분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 (마르코 1、14).
평소에 우리가 기도하는 마태오 형식의 주의 기도문에서『그 나라가 임하소서』는 바로 그 뒤에 잇달아 오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비는 원의로 해석한다. 그래서 이 세 가지의 원의가 주의 기도문의 첫째 부분을 이루고、그 다음의 세 가지 청들이 둘째 부분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루카의 짧은 형식 안에서『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하고 기도한 것은 다른 여러 가지 중에서 첫 번째로 그리고 가장 중요한 간청으로써 표현한 것만이 아니다. 이미 그 형식 안에서 보는 것처럼 이 간청기도 안에서는 전체를、즉 모든 것을 또 꼭 기도해야만 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다음에 연이어 바치게 될 세 가지 간청 안에서 더욱 확실해지고 완성될 전체성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가 오심은 모든 구약의 약속들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는 하느님의 모든 구원 행위가 끝남을 의미한다. 하느님 나라가 오심은 예수에게는 모든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나라가 오기를 기도의 마지막에서가 아니라 바로 시작에서 빌고 있음은 당연한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여기」와「지금」을 위하기보다 다른 것들을 앞서 정할 수도 있는 그런 하느님의 마지막 선물이 아니다. 여기서는 마지막 것이 첫째 것이 되었고 또 어떤 의미에서는 유일한 것이 되었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의 비밀이 본래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가르치지 않으셨다. 그리고 당신 자신이 하느님 나라를 어떻게 이해하고 계셨었는지에 대해서도 그 어디서도 분명하게 정의를 내린 적이 없다. 그분의 선포는 완성의 때가 왔다. 그러므로 마지막 날이『가까이 다가왔다』(마르코 1、15)고 알렸을 뿐이다.
마태오 복음사가를 제외한 다른 세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가 실제로 사용했던「하느님 나라」라고 했으나 마태오만은「하늘나라」라고 했다. 그것은「하느님」대신에「하늘」이라고 부르는 경외심에서 나온 랍비들의 관습을 따른 것이다.
◆하느님의 왕권 의미
따라서 하느님 나라와 같은 말이다.「나라」(왕국)라는 말은 하느님을 왕으로 모신 어떤 영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왕권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하느님 왕권」「하느님 통치」「하느님 지배」또는「하느님 주권」이라 할 수 있다.
하느님의 왕국이 임하기를 기도하는 사람은 왕이 직접 통치하기를 간청한다. 무엇보다 하느님이 이 땅 위에서 왕으로서 나타나시고 그분의 크신 영광이 온 우주 안에 가득히 채워지기를 비는 것이다. 하느님의 왕국이 임하기를 간절히 비는 간청 속에는 무엇보다 하느님께 영광이 되기를 바라는 크고도 중대한 관심사가 내포되어 있다. 예수의 기도 관심사 안에서 분명하게 드러난「하느님 중심」은 예수가 선포한「하느님 나라-소식」안에서도 볼 수 있다. 즉 모든 것이 하느님과 관련되어 있다. 하느님이 세상의 통치권을 맡으셔야 한다. 하느님이「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는 세상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1 고린 5、28 참조). 그러면 하느님께서 친히 통치권을 가지시고 다스릴 것이며 마침내는 그분의 거룩한 뜻이 이루어질 것이다.
하느님의 왕국이 실현되기 위한 조건은 무엇보다도 사탄(마르코 3、23ㆍ26)「이 세상의 두목」(요한 12、31:14、31:16、11)、「이 세상의 신」(-사탄을 가리킴、 2 고린 4、4) 세상의 모든「권세와 영광」을 넘겨준(루가 4、5 이하)「대기권을 다스리는 지배자」(-고대인들은 대기권을 악령들이 사는 영역으로 생각하였음、에페소 2、2)가 그분의 뛰어난 권세 아래 굴복 당하고(루카 10、18 묵시록 10、7 이하 참조)、성 안에서처럼 그분이 보루를 쌓아 지키는(루가 11、21 이하) 이 세상에서도 공격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힘센 자」를「묶어」(마르코 3、27、 묵시록 20、2 이하) 놓으신다. 사탄의 지배와 악령들은 아직 얼마 동안은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에 마주 대항하고 있을 것이다. (루카 11、20 비교) 여기 본래의 원수가 있고、 여기서 바로 결정적인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옛 교회에서는 사탄을 하느님의 원수로、예수의 반대자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하느님이 참으로 이 땅 위에서 다스리시고 그분의 거룩한 뜻이 이루어지려면 사탄만이 아니라 모든 반항적인 인간적인 뜻도 무너져야 할 것이다.
◆인자한 아버지의 선물
『온 마음으로-온 힘을 다해 사랑』하는「하느님 중심」은 예수의 품성과 도덕적인 요구들 안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는 하느님 나라가 인간이 율법을 지킴으로써 이 세상에 이룩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던 바리세이들의 오류에 걸려들지 않았다. 이미 하느님이 하늘에서 언제나 실현하고 있는 것처럼 세상 종말에 가서야 비로소 이 세상에서도 하느님의 뜻이 완전히 실현될 것이다(마태 6、10).
하느님 왕국은 이 세상 시대에서、여기서 인간들의 손을 통해 역사적으로 완전히 그리고 근본적으로 실현되지 않는다. 하느님 왕국은 모든 역사의 마지막이다. 오직 하느님 자신만이 사탄의 나라를 쳐부수고 인간 세상 안에서、세상 심판 때에 그분의 거룩한 뜻을 이루실 것이다. 그러면 하느님은「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것이다(1고린 15、28).
『아버지、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다가오는 그 나라는「아버지」의 나라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인자하심을 반영하는 아버지의 선물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하느님 나라-간청」과「하느님 나라-선포」는 아빠 호칭의 문맥 안에서 즉 예수의「아빠-관계」에서부터 결정되었으며 또한 표현되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만 올바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본래 예수의 말씀은 가난한 자、굶주리는 자、슬퍼하는 자들에게는 기쁜 소식이요 (루가 6、 20 이하) 죄인들에게는 초대(마르코 1、 28b)이다.
표징을 보는 자는 옛 예언자들과 왕들 보다 더 행복하게 찬미를 할 것이다. (루가 10、 23 이하). 그 기쁨은 마치 밭에 숨겨진 보화나 값진 진주를 발견한 (마태오 13、 44 이하) 사람의 기쁨과 비교할 수 있다. 그는 가서『모든 것을 팔고』『당신의 나라가 오소서!』하고 기도할 것이다. 이같이 기도하는 사람은 왕국이 하느님의 큰 선물이요「주어지는 것」임을 (루가 12、 32) 알고 있다. 인간은 다만「어린 아이처럼 그 나라를 받아들일 수」(마르코 10、 15)밖에 없다. 또「기다려야만 하고」(마르코 15、 43:루가 2、25)、그냥「유산」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완전히 하느님의 일이다. 어떤 인간의 행위로써도、비록 남김없는 헌신과 봉헌이 요청된다 할지라도 실현될 수는 없다. 오직 하느님만이 이루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간청하는 것은 본래 어떤 간청 형식을 취한 것이 아니라『부디 당신의 나라가 오시길 빕니다!』라고 겸손하게 바람을 나타냈을 뿐이다. 이같이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이 이미 이루셨고 또 성취시키시길 바라고 있는 바가 그 자신도 바라고 있는 바이며 또한 그의 유일한 원의임을 그분께 신뢰하며 기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 왕국은 하느님 통치와 영광 그리고 동시에 인간의 구원과 행복을 위한 하느님 나라라고 말할 수 있다. 하느님 통치가 실현되는 곳에서는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회개할 때 바람 가능
예수의 선포는 곧「다가오는」 하느님 왕국을 가리키고 있다. 이미 그 때가「다가왔다」(마르코 1、15:마태오 10、7: 루가 9、12 참조). 예수는「하느님의 왕국」을 종말론적인 의미에서 이해하셨다. 많은 이가 여기서 세상에서「성장해야 할」 나라의 표징과 권세를 간청하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다. 하느님 나라가 오기를 열망하는 예수의 간청은 마지막 날에 모든 것이 완성되기를 빌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하느님 왕국이 임하기를 간청하는 것은 첫 번째 관심사이고 가장 절박한 관심사이며 또한 유일한 관심이다.
하느님 왕국은 보다 미래지향적이다. 그러나 오직 미래만이 아니라 이미 과거이며 현재이기도 하다. 이는 예수의 본래 특징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매일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과 항상 관계를 가지고 있다. 지금 우리는 영원을 건설하고 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가 오기를 바라는 것은 지금이 구원의 때이고 하느님 통치의 날이 바로 오늘이라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다. 예수의 제자들은 여기서 꼭 그렇게 성취되리라고 믿으며 간청하고 있다. 벌써 완성의 때이고 이미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마지막 날이 오는 큰 전환기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아는 자만이 여기서 그처럼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진정으로 마지막 날이 오기를 간청하며 하느님의 큰 영광이 확연히 나타날 것임을 알고 있으므로 진정 기뻐할 수 있는 자만이 그처럼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간절히 비는 제자들에게는 다른 것은 모두 부차적일 것일 뿐 오직「하느님 왕국」을 얻기 위한 노력만이 요청될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기도할 수 있기 위해서는 예수의 회개의 요청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여러분은 그분의 나라를 찾으십시요. 그러면 여러분은 이런 것들도 곁들여 받게 될 것입니다』(루카 12、31). 이렇게 기도한다고 해서 그것이 삶에 대한 싫증이나 세상을 경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보다 더 하느님에 대해서 알고 하느님께 대한 기쁨을 가지기를 간청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하느님이 합당한 영예를 받으시고 그분의 일이 성취되기를 간절히 빌고 있다. 반 하느님적인 세상은 변화되어야만 할 것이고 우리들의 현세적인 지나가는 세상은 하느님의 영광을 완전히 나타낼 수 없기 때문에 새 창조가 이루어져야만 할 것이다. 이런 종말론적인「하느님 중심」안에서 세상은 다시금 좋은 창조를 이룩할 것이고 그릇된 절대성과 이념에서부터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은 당신이 선물 안에서-종말론적인 구원 안에서-자신을 영광되이 보여주신다. 하느님 나라는 곧 그분의 행복에 찬 나라에서 실현될 것이다.
◆첫 실현은 예수 부활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은 인간의 미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막연하게 멀리 있는 미래가 아니라 예수의 말씀과 행동、삶과 죽음과 함께 시작된 미래에 대해서 바로 이 땅 위에서 말하는 것이다. 미래와 현재 안에서、예수가 시작하고 바란 것은 하느님의 나라이다. 그러나 그 나라는 세상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 나라에 관한 비유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느님 나라는 미래에 영광스럽게 나타날 날을 향하여 자라가고 있다.
하느님 나라가 최초로 영광스럽게 나타난 것은 예수의 부활이다. 이때부터 하느님 통치가 온 세상에 퍼져나갈 시간이 시작되었다.
예수가 세운 교회는 아직 하느님 나라가 아니다. 그러나『그 나라의 시작과 싹이 되어 서서히 자라면서 그 나라의 완성을 갈망하며 영광 중에 그 나라의 왕과 결합되기를 기원하고 있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헌장 5).『그러고는 종말입니다. 그때 그리스도께서는 일체의 지배와 일체의 권력과 일체의 권세를 쳐 없애고 나서 그 나라를 하느님께 넘겨드릴 것입니다. 실상 하느님께서 모든 원수들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 잡아 놓으실 때까지 그리스도는 다스리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없어질 원수는 죽음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그이 발 아래 굴복시키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굴복하셨다고 했으니 그이에게 모든 것을 굴복시키신 분이 제외된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아드님께 굴복하게 되면 그때는 아드님도 자기에게 모든 것을 굴복시키신 하느님께 몸소 굴복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것입니다』(1고린 15、24~28)
이처럼 갈릴레아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하느님 나라는 마침내 존재하는 모든 것 가운데서 위대한 사랑으로 그 완성에 이를 것이다.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 메시지를 들을 자세가 되어 있는 것이다.『누구든지 어린이처럼 하느님 나라를 맞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마르코 10、15). 하느님 나라를 믿는다는 것은 이 아버지의 기쁨 안에서 인간이 불멸의 일치를 이루게 됨을 믿는다는 것이다. 오리게네(Ori-genes)는 예수를 가리켜『이분이 바로 하느님 나라이다』라고 말했다.『예수를 보는 것은 아버지를 보는 것』(요한 14、9)이다. 따라서 예수를 선포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고 교회는 이것을 선포하고 있다. 모든 세대를 통하여 예수를 전하면서 교회는 하느님 나라를 전해왔다.
『그렇다、내가 곧 오겠다』는 주님 말씀에 우리 모두 한마음으로 힘차게『아멘、오소서 주 예수님!』(묵시룩 22、20)、그리고『당신의 나라가 어서 오소서!』하고 뜨거운 마음으로 응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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