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원동주교좌성당 외관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정조로 978번길 5 조원동주교좌성당 성모상 앞에 섰다. 아기 예수를 품에 안아든 성모상 아래에는 ‘평화의 어머니’라고 적혀있다. 교구장 이용훈 주교가 늘 강의나 강론의 마지막에 신자들과 함께 바치는 기도가 떠올랐다.
“평화의 모후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평화의 모후. 교회가 마리아를 부르는 전통적인 호칭 중 하나다. 1차 세계대전 중이었던 1917년 베네딕토 14세 교황이 성모호칭기도에 평화의 모후를 삽입하면서, 평화의 모후에 전구를 청하는 신자들의 기도가 더 활발해졌다. 하지만 교구에 있어 평화의 모후는 단순히 마리아의 여러 호칭 중 하나가 아니다. 교구의 주보가 ‘평화의 모후’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곳 조원동주교좌성당의 설립을 계기로 교구의 주보는 ‘평화의 모후’로 정해졌다.
교구 제2대 교구장 김남수 주교는 1974년 주교 서품 당시부터 새 주교좌성당 설립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첫 주교좌였던 고등동성당이 최대 500여 명밖에 수용할 수 없어 교구의 행사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뜻이 얼마나 간절했으면 김 주교는 회고록을 통해 주교 서품식 성인호칭기도 중 “‘주교좌성당이 너무 작아서 안 되겠다. 좀 더 큰 것으로 지어야겠다’는 생각만 했다”면서 “엎드려서 성당 한 채를 다 지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물론 김 주교뿐 아니라 교구 안에서도 이미 고등동성당이 주교좌성당으로 협소해 더 큰 규모의 주교좌성당을 지어야한다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었다. 김 주교의 착좌식을 계기로 교구 참사회는 차성화(수산나)씨가 교구에 기증한 수원시 조원동 부지에 새 주교좌성당을 건립하기로 결정했다.
성당 건축을 준비하면서 어려움도 많았다. 1만4390㎡ 상당의 대지를 기증받았지만, 도시 계획에 따라 그 터를 가로질러서 십자형의 길이 나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네 갈래로 나뉜 대지 중에서 가장 큰 터에 성당을 지어야했다. 또 당시 조원동 일대는 미개발 지역이 대부분으로, 신자 수가 2000명이 채 되지 않았다. 이들의 힘으로는 건축 예상비용인 1억2000만 원을 마련하기가 너무 버거웠다. 여러 어려움들로 인해 성당 건축은 잠시 보류됐지만, 교구 사제모임에서 과반수의 찬성을 얻어 재개할 수 있었다.
조원동주교좌성당의 건축은 주교좌성당의 주임이라 할 수 있는 교구장 김남수 주교가 직접 관리했고, 비서실장 신부가 총감독을 담당하기로 했다. 교황청에서 보조금으로 4만 달러(당시 한화 6000만 원 상당)를 받았고 북수동본당을 비롯한 교구 내 모든 신자들이 성당건축에 힘을 모았다.
마침내 1976년 6월 28일 조원동성당 기공식을 거행했다. 이날 조원동성당은 ‘평화의 모후’이신 마리아께 봉헌됐고, 1977년 5월 18일 성당 준공과 함께 교구의 주보도 ‘평화의 모후’로 공식 선포됐다. 아울러 첫 교구좌였던 고등동본당은 준교구좌 본당으로 선포됐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