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와 개혁운동 과정
칼빈(Jean Calvin, 1509~1564)은 마르틴 루터 이후 가장 중요한 프로테스탄트 개혁가요 신학자로서 파리와 벨기에 사이에 있는 프랑스의 피카르디(Piccar-die)지방 노와용(Noyon)의 중류 가정에서 태어났다. 피카르디 지방은 프랑스 북쪽지방으로 단일지역이었으나 로마인, 게르만족, 프랑크족, 노르만족 등 여러 민족에 의해 점령 당해왔으며, 이 때문인지 반 외세적인 정신이 팽배해 있던 지역이었다.
이 지방은 비판정신이 강한 유명한 인문주의자들을 많이 배출했던 곳으로 권력 남용이나 관료들의 폐습, 외세의 억압 등에 강하게 저항하는 지역이었다. 칼빈이 태어난 노와용도 피카르디 지방의 분위기와 같았고, 더구나 중세의 왕들이 대관식을 가졌던 역사적인 도시로서 주민들의 긍지가 대단했던 곳이었다.
당시 프랑스의 정치적인 상황으로는 봉건 군주제에서 절대 군주제로 왕권이 강화되어가는 추세였다. 국민의 대의기관들이 있기는 하였으나, 그 권한이 점점 한 사람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그런 대로 다른 나라들보다 넉넉했다고 한다. 문화적으로는 역시 인문주의 활동이 활발했고, 독일에서 일어난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에 대한 선전 책자들이 상인들과 군인들을 통하여 암암리에 전파되어 기존 세력에 불만을 품고 있던 사람들이 쉽게 개혁운동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 선전 책자들은 개혁 신학의 장점들과 가톨릭의 부정적인 면만을 부각하여 강조하면서 교황권, 대사, 수도자들의 서원 등을 공격하였다.
칼빈의 아버지는 노와용 주교좌 성당 참사회의 총경리로서 업무 진행인이요 재산 관리인이었다. 그는 교회와의 채무관계 등 모종의 불화로 인해 참사회 및 주교와 소송을 하게 되었고, 1528년 파문을 받았으며 1531년 파문된 상태에서 사망하였다. 같은 무렵 보좌신부였던 그의 형도 성직자 신분으로 금지된 결투문제로 교회와 불화하여 개혁운동을 받아들이면서 병자성사를 받지 않은 채 사망하였다. 이와 같은 가정적인 분위기는 칼빈에게 반 가톨릭적인 감정을 가지는 데 큰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고 있다.
1521년 칼빈은 12세 때 부친의 주선으로 노와용에서 성직록을 얻고, 이 덕분에 그는 1523년 파리와 다른 여러 지방에서 공부하였는데, 이 시기에 그는 유명론을 배웠다. 그 이후에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오를레앙(Orleans)과 부르즈(Bour-ges)에서 법학을 공부하였다. 1527년부터 성직과 신앙문제에 회의를 갖기 시작하였는데, 이즈음 그의 아버지는 교회 당국과 심각한 불화 관계에 있었다. 1531년 그에게 법학을 공부하도록 당부한 아버지가 사망하자 파리로 돌아와 인문주의 학문에 심취하여 문학을 공부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프랑스 성서운동의 인문주의적인 개혁사상에 심취해 있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이냐시오 로욜라도 파리의 소르본느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두 사람은 서로 만난 일이 없었다고 한다. 거의 같은 시기, 같은 지역에서 공부하였지만 두 사람의 교회 역사에서의 역할은 서로 달랐다. 1533년에 에라스무스와 루터를 인용한 이단적 강연의 초안을 잡았다는 혐의를 받고 은신하면서 교회를 초창기 사도시대의 순수성으로 복귀시킬 사명을 느끼고 로마 가톨릭과 결별하고 프로테스탄트가 되었다. 후일 그가 쓴 자서전적 회고록에 의하면「돌연한 개종」은 1533년과 1534년 사이의 겨울에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뚜렷하지 않다.
1535년 프랑스왕 프랑스와 1세의 이단에 대한 박해로 스위스의 바젤로 피신했으며 여기서 본격적인 개혁가로 활동하였다. 1536년 라틴어로「그리스도교 강요를 완성하였는데, 이 저서는 초기 프로테스탄티즘의 최고의 신학적 저술로 꼽히며 그 뒤 여러번 개작되었다. 그의 신학사상의 근본 요소가 요약된 이 저서에서 신조, 성사, 전례, 교황권 등에 대하여 전통 교리와는 상반된 입장을 표명하고 가난하고 박해 받는 교회, 소위「복음적인 교회」와 가톨릭교회를 대비시켜 기성교회를 단죄하고 성서 위주의 새로운 교회상을 제시하였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제네바의 종교 개혁을 후원하고 함께 일할 것을 종용한 기욤 파렐(Guillaume Fa-rel, 1489-1565)과 함께 1536년 여름에 제네바로 갔다. 제네바는 독일제국에 속한 영토였으나 자치권을 가지고 통치되던 자유 도시였다. 이 도시는 권력이 주교, 시 평의회, 사보이아 공작 등에게 삼등분되어 균형을 이루고 있었으나, 사보이아 가문에서 주교직까지 차지하면서 그들의 영향력을 증대시키자 시 평의회를 중심으로 하는 시민들과의 긴장관계가 조성되었다.
당시 제네바는 인구 1만3천 명 가량의 도시로 시민들은 자치권을 얻기 위해 가톨릭 주교와 동맹관계에 있는 사보이아 공작에 맞서 이웃 도시 베른(Bern)의 프로테스탄트들의 도움을 받아 투쟁하고 있었다. 1536년 말, 그는 이 도시의 설교가요 교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교회 규정의 필요성을 느끼고 규정을 만들었는데 이 규정은 월 1회의 성찬식에 관한 엄격한 규율을 규정하여 부당한 자는 성찬식에서 제외되는 벌을 받았다. 이 벌은 일종의 파문과 같았다. 그는 처음부터 소위 신정정치에 기반을 둔 엄격한 개혁을 추진하려 하였으므로 1538년 가톨릭 세력과 시민들에 의해 파렐과 함께 추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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