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령 스위스는 1499년의 전쟁에서 독일제국으로부터 정치적으로 독립하였다. 유럽의 다른 나라들처럼 정치, 경제, 사회, 종교적으로 혼란스러웠고 많은 폐습이 누적되어 개혁의 요구가 점증하던 상황이었다.
츠빈글리(Zwingli Huld-rych)는 1484년 1월 1일 토겐부르크(Toggcnburg)의 뷜트하우스(Wildhaus)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성직자인 그의 백부에게 맡겨져 초기의 교육을 받았고 그 후 바젤과 베른, 빈(Wien)에서 1502년까지 구 방법에 따라 공부하였고 끝으로 다시 바젤의 인문주의 학교에서 1506년까지 공부하여 수사학 학위를 받았다. 1506년 콘스탄츠에서 사제품을 받고 성직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1516년까지 글라루스에 머물며 고전과 교회 학문을 더 공부하면서 인문주의자들과 교제하였는데 특히 에라스무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즈음에 그는 오리게네스, 예로니모, 아우구스티누스 등 교부신학에 심취하기도 하였다. 글라루스와 아인지델른에서 사제생활을 하면서 교황을 위한 북부 이탈리아의 전투에 군종신부로 스위스 용병에 두 차례 동반하였고 그로 인해 교황청의 연금을 타게 되었다. 그러나 용병에서 귀국한 후 반 외세적인 생각으로 외국을 위한 용병에 반대하였는데 이러한 그의 사고방식이 반 교황청의 정신을 견지했다고 볼 수 있다.
1519년에 있었던 라이프찌히 종교 토론 이후 처음으로 루터에게 관심을 가졌으나 루터로부터 받은 영향은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1522년 그의 등장과 함께 제시된 그의 개혁안은 루터에게서처럼 깊은 개인적, 종교적 투쟁과 탐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실천적인 고려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그의 설교 내용을 실천한다는 의도로 사순절 동안 공공연하게 육고기를 먹으며 교회의 재계 규정과 사제의 독신제를 반대하였다. 그는 1522년 안나 마이아와 비밀리에 결혼하고 1524년에는 그 여자와 공공연하게 결혼생활을 하였다.
콘스탄츠의 교구청이 그를 고발했을 때 츠빈글리는 주교와 사이가 좋지 않은 시 의회로 하여금 자기를 지지하도록 하는 데 성공하였다. 시 의회가 기획한 공개 토론회(1523년 1월과 10월)에서 성서에서 증명될 수 있는 것만이 유효하기로 한 원칙을 세우고 성서원칙, 성화상 공경, 미사에 관해 토론하기로 하였다. 츠빈글리는 소위「67개 논제」를 제출하여 성서를「개혁」의 유일한 원칙으로 해석하여 모든 예식과 축성의 폐지, 성당 성화상의 제거, 미사의 폐지, 수도회의 해산, 교회 성직록의 개편, 시립 혼인재판소 설치 등 교회 고유의 권한을 시 의회에 일임하면서 급진적인 개혁안을 전개하였다.
그의 신학 사상을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하면, 성서 해석에 있어서 객관적인 교도권이나 초인간적인 권위를 배척하고 신앙 체험의 주관적인 심령주의를 강조한 성서 제일주의, 교회 조직에 있어서 신학적인 바탕보다는 세속 통치기관에 준한 조직을 도입하여 교계제도를 거부한 교회론, 칠성사 중 성세와 성체성사만을 인정하면서도 상징적인 의미로 평가한 성사론, 그리고 하느님의 섭리와 예정에 대해 선과 악이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된다는 범신론적인 형태를 드러내고 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의지는 무기력할 뿐이라고 한다. 그는 성서를 국가의 윤리와 교회의 제반 규율을 통제하는 하느님의 율법으로 해석하여 개혁운동의 범위를 국가와 정부까지 포함시켰다. 결국 스위스에서는 종교 개혁의 발발과 그 과정이 독일보다 더 정치적이며 인문주의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1524년 초 부터 가톨릭 신앙에 충실한 여타의 주들이 동맹을 결성하여 츠빈글리의 개혁의 침투를 막기로 하였다. 그러자 시의회가 더 이상의 개혁 조처를 취하지 않기로 하고 츠빈글리가 시의회의 결정에 따르자 그의 급진적인 추종자들이 그를 배신자라고 비난하였다. 그의 추종자들 가운데 과격파들은「다만 신앙에서」의 원칙을 극단적으로 해석하여 신앙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없는 유아들이 받은 세례는 무효라고 주장하여 분열하였다.
그들은 우선 새로 태어난 그들의 자녀들에게 그들이 자주적으로 사고할 수 있을 때까지 세례를 주지 않았고 유아세례를 받은 모든 이에게 재세례를 받도록 하였다. 그러나 갓 태어나 부모를 알아보지 못한 아기라도 그 부모의 아기이고 부모의 보호를 받으며 자라나듯이 신앙에 대한 자아 의식이 없는 아기일지라도 성세성사의 은총으로 하느님의 자녀로 성장하게 된다.
츠빈글리가 유아 세례를 인정하자 그를 공격하였다. 그러자 그는 시 의회로 하여금 재세례 문제에 개입하게 하여 아직 세례 받지 않은 아이들에게 즉시 세례 받도록 명하고「재세례파들」의 집회를 금지하였다. 박해를 받은 재새례파들은 더욱 맹렬히 광신적인 선동을 하면서 다른 지역으로 재세례운동을 확산시켰다.
시의회에 대한 츠빈글리의 영향력이 점점 강화되어 1525년 4월 시 당국은 미사를 폐지하였고 이로써 가톨릭과 단절되었다. 1526년 아아르가우의 바덴에서 성체성사, 원죄, 연옥, 성화상 공경, 성인 공경, 교회 계명을 다루는 종교 토론회가 개최되었다. 스위스 의회는 절대 다수로 가톨릭을 옹호하였으나, 취리히는 이 판결을 거부하고 정치, 종교적인 공격을 자기 주 밖으로 전개시켰다. 츠빈글리의 종교 개혁 운동은 독일 남부에 크게 전파되었으나 후에 칼빈파에 가담하였다. 츠빈글리와 루터간의 일치는 성체의 실재성 문제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루터가 성찬식에서 성체의 전질변화(全質變化, Trans-substantiatio)를 부인하기는 하였으나 그리스도의 실재를 고수한 반면, 츠빈글리는 다만 의미적으로만 해석하였다.
1529년 6월 최초의 카펠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으나 중재적 화의로 저지되었다가 1531년 10월에 다시 전쟁이 일어났는데 이것이 최초의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과의 종교전쟁이었다. 츠빈글리도 칼과 도끼로 무장하고 출전하였으나 1531년 10월 11일 전사하였다.
츠빈글리에 대한 평가는 종교적인 입장에 따라서 다양하다. 그가 종교와 정치를 혼합하여 국제 정치에 혼란과 분쟁을 야기시켰다는 비난도 받고, 다른 한편으로는 루터보다 교리적이고 사회적인 정책에서 일관성을 유지하고 칼빈보다 더 의문주의적이었다고 평가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의 개혁 의도가 그리스도교의 일치를 외면하고 종교를 정치적인 조직의 개혁 대상으로 삼은 것은 그의 큰 오류로 지적될 수 있겠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