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된 우리, 그분의 자녀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드리는 첫 마디는『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당신의 나라가 오소서』라는 말씀이다. 이 기도는 청원, 간청기도 형식을 취하고 있다. 즉 이 두 가지 청원은 형식 면에서 서로 병행할 뿐 아니라 내용 면에서도 서로 상응한다. 그래서 그 뒤에 잇따라『당신의 나라가 오소서』하는 청원기도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는 이 첫 번째 간청은 과연 간청기도일까?『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하고 말한다면 우리는 쉽게 그리고 분명하게 간청기도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더욱이『거룩히 빛나시며』라고 덧붙여 말한「거룩히」는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며 또 어떻게「거룩히」만든다는 것일까?
◆청원ㆍ간청기도 형식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그분의 이름을 부당하게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 것, 혹은『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에』라는 말을 절도 없이 말하는 것은 하느님의 이름의 거룩함을 손상시키는 것이라고들 믿어왔다. 마르틴 루터는 바로 이 문장을 해석하면서『무엇인가 약간 어둡고 못 알아듣는 말로 표현한 것』이라고 하였다. 즉 불명확하게 이해된다는 말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 말씀의 여러 가지 의미를 잘 이해할 수 있으려면 이 기도문의 말 마디마디가 구약과 유태인의 신심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알아야만 한다. 예컨대, 시나고가(유태교의 예배당)의 예배 마지막에 드리던 기도의 첫 번째 청원기도와 흡사하다:『당신 뜻대로 지으신 이 세상에서 그분의 이름은 영광 받고 거룩하여지소서』.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주의 기도문을 이해하려면 유태교 기도 역사 안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유태교와 고대에서는 이름과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을 동일시하였다. 그러므로「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자는「하느님」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이름은 외적인 인격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인격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태오는『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당신의 나라가 오소서』하는 이 두가지 청원에『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짐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하는 셋째 번 청원기도를 덧붙여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앞에서 말한 두 청원과 같은 뜻을 지니고 있다. 앞의 두 청원은 마지막 날의 완성을 빌고 있으며 독성과 남용으로 말미암아 더럽혀진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칭송 받고 또한 어서 빨리 그분의 왕권이 환히 드러나게 되길 간절히 빌고 있다:『너희가 더럽혔기 때문에 이교도들 가운데 더럽혀진 나의 거룩한 이름을 나는 다시 영예롭게 만들리라. 그리하여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내가 너를 너희에게 거룩한 이로 내보일 때 그들 이교인은 내가 야훼임을-야훼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느니라-깨달으리라』(에제키엘 36, 23).『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는 이 간청들은 깊은 비참과 곤궁의 수렁에서부터 치솟는 부르짖음이라 할 수 있다. 예수의 제자들은 악의 세력하에 노예가 된 세상, 그리스도와 반 그리스도가 대적하여 싸우는 이 세상에서 하루 빨리 하느님의 왕권이 크게 나타나기를 기도하였다.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이면 그는 하느님의 약속을 실천할 뿐 아니라 굳은 신뢰감으로 하느님의 손에 자신을 내맡기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왕림 전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소서』하는 청원에서도 하느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사람의 준비자세를 전제하고 있다. 이것은 하느님이 당신 영광과 권능을 드러내시기를 청하는 기도이다. 이 청원은 곧『그 나라가 임하소서』하는 청원기도처럼 하느님이 우리의 세상과 생활 안에서 나타나시기를 비는 간청이다. 그러므로『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소서』라는 바람(원의)은 흔히들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서문식의 찬양 방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청원의 내용이 말해주고 있듯이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 안에 하느님의 영광이 아주 중요한 관심사라면 그는 하느님을 어떤 찬양 방식에 매여 표현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하느님의 영광이 그의 마음 안에 아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하느님의 영광이 크게 드러나고 또한 참으로 칭송 받도록 자신을 하느님께 내맡길 것이다. 그러므로 이처럼 기도하는 자는 모든 것이 하느님을 중심으로 움직여지는 자신의 중대한 관심사를 기도 안에서 바람으로 표현하게 된다.
예수는 기도를 시작하며 하느님께 영광 드리는 형식(doxology)을 취하지 않고 아주 단순하게 그의 바람을 표현하였다. 이것은 기도하는 사람이 높은 분 앞에서 아뢰는 것처럼 말하지 않고 마치 어린 아이처럼「아버지」앞에서 그의 청을 곧바로 말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예수의 모든 기도는 본래 올리브 동산에서처럼 아주 깊은 데서부터 시작하였다.『아빠, 아버지, 당신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마르코 14, 36)
아버지께 모든 것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즉 예수의 기도 가르침 안에서 청원기도가 그 얼마나 신뢰에 가득 찼는지를 볼 수 있다. 하느님의 영광은 이제 신뢰에 찬 청원기도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하느님의 영광은 이제 신뢰에 찬 청원기도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예수는 전적인 신뢰, 산을 옮길 만한 신앙, 아버지의 권능과 사랑을 외치는데 지칠 줄 모르셨다.
◆참된 하느님의 찬양
아버지께 모든 것을 신뢰하며 드리는 간청은 바로 예수의 제자들로부터 요구되는 참된 하느님 찬양인 것이다. 그 어떤 간청도『사랑하는 아버지, 당신의 이름이 거룩해지소서』하는 간청기도보다 더 중대한 청원이 있을까?
여기서 하느님의 영광에 대한 원의가 기초적이며 모든 기도의 원의 중에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여기서 하느님의 관심사가 기도형태 안에서 아주 뚜렷하게 나타났다. 즉 간청이 바람으로 표현된 것이다. 기도하는 자는 아버지 앞에서 직접 청원을 하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아주 겸손하게 그의 바람을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물론 이미 허락된 청원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예수가 하느님을「아빠」라고 부르는 것은 이미 그분을, 그리고 그분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오실 아들」 예수는 아버지가 언제나 당신과 함께 가까이 계심을 알았고 또한 그분의 오심과 그분의 오실 나라에서도 현존하실 것을 알고 있었다. 예수처럼 아버지를 생각하며 기도하는 자는 하느님의 영광이 오직 하느님의 업적으로써 성취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이 하느님의 업적은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자 안에서 이루어진다.
하느님의 이름은 하느님 자신을 통해서 거룩해진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는 다만 이에 대한 우리의 기쁨을 기도 중에 표현할 뿐이다. 또 우리가 이미 말하기도 전에 들어 하락됨을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청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간절한 원의를 말할 뿐이다. 그러나「날과 시간」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마르코 13, 32)
우리는 종종 유태인의 기도 안에서「이름을 거룩하게」라는 말이 사용됨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거룩해져야 할 아버지「이름」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다시피「아버지」는 예수가 사용한 하느님을 일컫는「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는 우리에게 이 기도 가르침을 통해「이름」을 가진 하느님을 알려주셨다. 그분은 인격적인 하느님「너」(You)로 부를 수 있는 분이시다. 그뿐 아니라 이름의 거룩함에 대해 말하는 것은 곧 하느님 자신의 거룩함에 대해서, 인격적인 하느님의 거룩함의 계시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야훼께서 온 세상의 임금으로 오르시면, 그날부터 온 세상에서 하느님은 야훼뿐, 사람들은 그의 이름만을 부르게 되리라』(즈가리야 14, 9 참조).
◆구약 속의 하느님관
구약 안에서 하느님이 거듭 당신의 이름을 계시하셨을 때는 당신 자신을 열어 보이시는(계시하시는) 하느님이심을, 인간들과의 공동체,「계약」을 찾으시는 하느님이심을 보여주고 있다. 하느님의「영광」처럼 그분의「이름」역시 그분의 권능을 뜻한다. 하느님이「거룩해지신다」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가? 우리는 여기서 성급하게 하느님의 계명을 생각하거나, 비록 좋은 의미로 사용된다 할지라도「헛되이 이름을 부르지 말라」는 것으로 말하거나 해석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하느님의 이름을 언제나 계명에 따라서 거룩하게 보존해야 한다는 것으로 역설해서도 안 된다.
하느님을「거룩한 분」으로 부르는 것은 무엇보다 모든 세상 것에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곳에 계시는 하느님을「거룩한 분」으로 그리고 완전히 비교조차도 할 수 없는 하느님을 뜻하는 것이다.「거룩하심」은 개념적으로 요약한 하느님의「특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존재, 그분 자신을 의미하는 것이다.
유태인들의 기도 안에서「거룩하게 하다」라는 동사는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다른 두 동사와 같은 의미로 쓰여지고 있다. 예컨대 마니피캇(Magnifi-cat 성모의 노래)에서 사용된「크게 만들다」라는 동사다:『내 영혼이 주님을 크게(들어높이다 끌어올리다 찬양하다) 한다』(루가 1, 46). 하느님을『거룩하게 한다』는 말은 그분을 아주 높은 분으로, 그분의 권위를 인정하여 합당한 명예와 존경을 드림을 뜻한다. 때때로 우리는『거룩하게 한다』를『영광을 드러낸다』로 해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에 걸맞는 병행구로는 요한 12, 28을 지적할 수 있겠다:『아버지,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소서!』.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의『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는 기도 원의를『아버지,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소서, 당신의 영광이 당당하게 나타나소서』라고 자유롭게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합당한 존경심 요청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오직 하느님 뿐이시다. 예수의 활동과 말씀은 하느님을 위한 것이었다. 나자렛의 예수 안에서「하느님 중심」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는 것이다』(마르코 12, 28~34). 그러므로 하느님은 갈라지지 않은 마음으로 당신을 섬기기를 요구하신다(마태오 6, 24:6, 19 이하 비교).『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소서』하는 기도 이면에는 당신 스스로 지니고 계신 하느님의 영광이 이름의 거룩함 위에 나타나기를 크게 열망하고 있다. 이처럼 하느님의 영광은 모든 원의와 동경의 목적으로써 예수의 큰 관심사이다. 우리는 이 청원을 종말론적인 실현에 대한 열망이나 거룩함의 완성으로만 좁게 이해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의 거룩함, 영광, 위대하심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원의는 모든 찬미와 영예 위에 높으신 하느님의「이름」이「거룩해지기를」바라는 데 있다.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제자들이 기도를 시작할 때 제일 먼저 순수한 마음으로 그분이 가장 좋아하는 원의를, 즉 그분의 간절한 관심사를 표현하길 원하셨다:하느님이 위대하시고 영광스러우시기를! 하느님으로서 인정 받으시고 당당하게 나타나시기를! 이처럼 예수는 당신의 기도 속에서 무엇보다 그분의 중점적인 관심사가 드러나기를 바라셨다.
◆세말에 완전히 실현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의 이름을 합당하게 거룩히 할 수 있을까? 그것은 하느님의 거룩하심에 걸맞는 윤리적인 삶과 하느님을 찬양하는 삶을 통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온 세상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은 오직 종말에 가서야 이루실 하느님의 일이다:『하느님의 이름이 위엄차시고 높으시니 기리고 노래하라』(느헤미아 9, 5).
하느님의 이름이『거룩히 빛나시며』라고 우리가 기도를 시작할 때 그에 앞서『아빠, 사랑하는 아버지!』라고 불렀었다. 예수는 우리에게 하느님을『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서 고백할 수 있게 해주셨고 또한 하느님의 신성과 더불어 그분의「아버지다움」을 보여주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을「아빠」라고 부를 수 있음에서 그분의 거룩함, 우리와는 전혀 다른 그분의 존재를 곧 사랑, 헌신, 자기 존재를 곧 사랑, 헌신, 자기 양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는 예언자적인 전통 안에서『이름을 거룩하게』한다는 것은 하느님이 아빠로서 그분의 계약의 충실성과 또한 그분의 은총과 자비를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하셨다.『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제일 먼저 드리는 기도 원의는 자연적으로 장차 오게 될 하느님의 나라, 왕국을 간청하도록 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종말에 대한 예수의 깊은 관심사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거룩하심」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꼭 마지막 날이 와야만 한다는 것이다.
『아빠, 아버지,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기도할 때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있어 오로지 모든 것이어야 함을, 우리의 큰 관심사이며 우리의 관심 전체이고 또한 불타는 사랑이어야만 할 것이다. 오직 이 같은 큰 원의를 가진 자만이 기도하면서 예수의 기도 가르침을 올바르게 실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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