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목사가 그날 밤 늦도록 내게 들려준 이야기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아버지가 북한 공산당에 의해 살해되는 등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리목사는 남한으로 도망했고 후에 다시 미국으로 이민을갔다.
(그는 자신이「뉴욕」에서 반한 운동을 벌여온 사람 중의 하나라고 말해주기도 했다.)
1980년 리목사는 이집트「카이로」에 있는 장로교회를 방문한적이 있는데 그때 북한의 외교관을 만났으며 그 외교관이 당시 북한 부주석 강양욱과의 면담을 제의、북한을 방문할수가 있었다. 그는「카이로」-「동벨르린」-러시아-평양으로 연결되는 여행노선을 선택했다.
그가 북한을 방문하는목적은 그의 가족을 만나기 위한 것이 었으며 강양욱을 만난데 이어 그는 소집단속에 섞여있는 두 누이동생을 만날수가 있었다. 두 누이 동생과의 상봉은 30여년만에 처음이었다. 강양욱의 처는 리목사에게『1970년 당신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울면서 전해주었다. 어머니가 묻혀있는 함홍에는 당시 리목사의 누이동생 세명이 살고 있었음에도 그는 어머니 묘소를 찾아갈 수가 없었다.
북한방문 1주일 동안 리목사는 격렬했던 전쟁의 영향으로 도시에 남아있는 교회는 없다고 들었다. 다른 건물에 대한 필요성이 너무나 컸기때문에 교회재건에 대한 우선권은 있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자들은 각자 가정에서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평양에서 한때 미군 사령본부였지만 지금은 전쟁박물관으로 사용되고있는 장소를 방문、전쟁중「미군의 잔학행위」가 묘사돼 있는 필름을 볼수 있었다. 리목사는 개신교 신자들과 목사들이 미군침입의 전진기지역할을 했다고 묘사된 그 필름을 보고 크게 놀랐다. 그는 박물관장과 강양욱에게『어느 부분은 사실일수도 있겠지만 과거의 교회는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의 교회이며 정의의 교회였다』고 필름의 허구성을 항의했다.
흥미있게도 강양욱은『그점은 다 알고있다. 하지만 인민들에게 너무 오랜기간동안 거짓을 이야기 해왔기 때문에 특별한 변명거리가 생기지 않는한 바꾸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그들은 미국과의 관계를 전환시킬 기회를 찾고 있었으며 리목사는 그들이그점을 설명하기위해 외국교회 관계자들을 초청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런 이유 등으로 리목사는 어쩌면 북한에서의 교회의 상황이 개선될 가능성이 있을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방문중에 리목사는 더 이상 여동생들을 만날 수 없었다.
현재 그는 그의 가족을 만나야겟다는 생각을 버리고 북한정부에 승인을 받을수 있는 교회의 개방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으며 내년 안식년에 북한을 다시 방문하길 원한다면서 나에게 같이 동행하자고 초청하기로 했다.
결론적으로 리목사는 나에게『나는 한국의 장래를 위한 반정부ㆍ반인권투쟁의 표면에 나서지 않겠다. 나는 북한이 문호를 개방하는 날이오리라 생각하며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믿고있다. 우리는 화해를 위한 새로운 방법을 모색해야한다. 그것이 바로 교회 본연의 역할이다. 북한은 미국을 적대시하고 있지만 현재 그들은 미국과 가까워질 수 있는 명분을 찾고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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