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에 나는 장춘대학에서 개신교 신자이며 영어를 말할 수 있는 어떤 교수와 대화를 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나에게『문화혁명의 격동에서 남은 것은 커다란 공허감뿐』이라면서『그때 사람들은 당이 중국을 다스릴 능력을 상실했을 것으로 보았다』고 말했다.
그는 또『그점이 크리스찬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삶의 의미를 던져줄 좋은 기회』라고 말했다. 바로 그런면에서 공산당은 매우 조심스럽게 상황을 관찰하고 있는것 같았다. 왜냐하면 이데올로기의 영향이 그같은 공백 사이로 파고들어 현재의 공산체의 약점을 이용할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는『젊은들이 대단히 많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고 덧붙였다.
나는 그로부터 북한을 방문했던 한국인들은 중공생활에 비해 북한에서의 생활이 혹독한 사실을 목격했기 때문에 중공으로 되돌아 오려한다는 사실 등 보다 많은 것을 배웠다. 그는 또 교회 지도층에서는 정부의 요구와 교회(신자)의 요구 사이에서 매우 협소한 길을 걷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기도 했다.
리목사、장춘대학 교수 등 내가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는 개신교도들의 현실에 관한 내용들이었지만 그것은 마치 중공에서의 가톨릭교회의 위치에 유사하게 적용되는것 같았다. 나 또한 북한에서 교회의 재건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아마도 중공의 상황을 따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4시간동안 기차여행 끝에 나는 다음 목적지인 흑룡강성에 있「하르빈」(HARBIN)에 도착했다. 그날은 일요일 아침이었는데 사람들은 성당으로 모여 들었고 몇몇 사람들이 성당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일일이 체크하고 있었다. 그들은 다름아닌 CPA(애국가톨릭교회) 회원들이었다. 그 상황은 바로 오늘의 중국교회를 대변해주고 있었다.
그 성당에서 나는 1979년에 주교로 승품된 H주교를 만났으며 52년에 서품된 62세의 Z신부도 만날수가 있었다.
하르빈성당은 1926년 프랑스선교사에 의해 지어졌었는데 문화혁명 기간 중 다른 두 성당과 함께 파괴되어 버렸다. 현재 성당으로 사용하고있는 건물은 전에 러시아 정교회 경당으로 사용되던 건물이었다. 그 경당은 문화 혁명 기간 중 모든 러시아 정교회 경당이 파괴되었고 더 이상 정교회 신자들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가톨릭으로 이양된 것이었다.
「하르빈」지역에는 전에 50만명가량의 백계러시아인이 살았으나 현재는 27명만이 남아있었고 그중 가장 젊은사람이 61세였다.
미사는 1층 또는 2층에서 봉헌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복구되기 전까지 성당건물을 사용하던 공장이 지하로 옮겨졌기 때문이었다.
그 성당구역에는 2천명가량의 신자가 등록돼 있었다. 공산당이 들어서기전 그 교구에는 20개가 넘는 성당이 있었으나 지금은 3곳만이 개방돼있을 뿐이었다. 나는 이지역에서 내가 방문했던 성당들이 교회재산을 되돌려 받기위해 거센바람이 일었던 79년과 80년사이에 문을 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곳에 남아있는 수녀가 몇명되지 않았는데 몇몇은 아직 공동체에 있었으며 다른 이들은 집단노동에서 벗어나 그들의 가족과 함께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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