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력투쟁에 의한 일치 시도
가능한 한 대화와 타협을 통하여 재일치를 이루려고 공의회 개최를 시도했지만 종교 외적인 여러 가지 이유로 자꾸 연기되었다. 그래서 1539년 4월 10일 프랑크푸르트 강화조약을 맺어 신학자와 평신도간의 토론을 통하여 독일의 종교 분열을 종식시키자는 데 합의하였다. 루터와 칼빈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서로 타협과 양보의 정신을 가지고 몇 차례의 회답을 가진 이후 1541년 4월 5일 레겐스부르크에서 제국의회를 열어 최종적인 합의를 보려 하였으나 성서와 교회에 관한 교리에서 합의하지 못하였다. 이제 그 어느 때보다도 공의회가 긴급하게 열려야 했다.
카알의 재촉으로 바울로 3세 교황(1534~1549)은 1542년 6월 29일 공의회를 트리엔트로 소집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바로 열리지 못하고 1545년 3월 15일에 소집되어 회합은 12월에 가서야 이루어졌다. 슈말칼덴 동맹군의 위협과 트리엔트의 전염병으로 중단되고 장소가 교황의 임의로 볼로냐로 옮겨졌다.
개혁가들과의 합의가 수포로 돌아가고 슈말칼덴 동맹의 군사적 위협이 현실적으로 다가오자 카알 5세는 전쟁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의 적대자들 가운데, 특히 루터에 의해 비밀리에 승인된 중혼으로 독일 전역에 추문을 퍼뜨린 헷센의 방백 필립과 삭손의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가 주모자격으로 대항하였다. 이미 1542년 그들은 황제와 가톨릭의 열렬한 지지자인 브라운 슈바이크의 하인리히 공작을 습격하고 그의 영토에 종교개혁을 강제로 도입하였다. 그래서 카알 5세는 그들을「제국 평화의 파괴자」로 단죄하고 추방령을 선포하였다.
1547년 4월 24일 뭘베르크(Mluhlberg) 근처에서 벌어진 전쟁에서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이 패전하고 선제후 지위는 카알을 지원한 삭손의 모리쯔(Moritz)에게 양도되었다. 이러한 군사적인 성공 외에 바로 이즈음에 그의 적대자들의 주인공들이 세상을 떠났다. 1546년 2월 18일에 마르틴 루터는 아이스레벤에서, 1547년 1월 28일에는 영국왕 헨리 8세가, 1547년 3월 31일에는 프랑스왕 프랑소와 1세가 세상을 떠났다. 루터의 죽음과 뮐베르크에서의 패전은 프로테스탄트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안겨주었다. 황제는 군사적인 승리가 바로 종교적인 분쟁을 해결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정신적 운동을 억압하는 군사적인 승리는 일시적인 결과는 가져올 수 있으나 실제로 지속적일 수 없다는 것을 역사를 통하여 배울 수 있다.
뮐베르크 승전 1년 후에 카알 5세는 무력적인 싸움이 무익하다는 확신을 하고 공의회에 희망을 걸게 되었다. 교회문제의 해결은 교황청과 합의하에 공의회에서 이루어져야 했다. 그러나 공의회 개최 장소문제로 교황과 황제가 합의하지 못하여 자꾸 연기되었다. 그래서 카알은 독일의 종교문제를 자신의 주도로 해결할 결심을 하였다. 1547년 9월 1일 소위「아욱스부르크 무장제국 의원」에서 자신의 해결안을 지시하여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신학자들로 하여금 조정안을 마련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공의회의 확정적인 결정이 있기까지 잠정적으로 양측이 모두 따라야할「잠정규정」이 발표되었다.
본질적으로는 정통적인 교리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나 교회 규정에 해당한 사제의 결혼과 평신도의 양형성체배령이 프로테스탄트에게 예외적으로 허용되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양측 모두 만족하지 않았다. 교황은 교회문제를 황제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에 대하여 만족하지 않았고 프로테스탄트는 자기들이 교리와 다른 내용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항의하여 황제는 큰 난관에 부딪쳤다. 또 정치적인 이해관계 때문에「영주의 반란」이 일어났는데 그 가운데는 한때 카알을 지원했던 모리쯔도 포함되었다. 1552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적대국인 프랑스왕 앙리 2세와 비밀리에 계약하여 메쯔, 뚜울, 베르당, 감브리아 등 제국 도시들을 내어주는 대신에 군사적, 재정적인 원조를 받도록 하였다.
그들의 기습을 받은 황제가 간신히 피신하고 트리엔트에서 재개된 공의회는 흩어져버렸다. 군사적인 힘도 신학적인 토론도 해결을 가져올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카알은 독일 종교문제의 해결을 그의 동생인 페르디난드에게 맡겼다. 페르디난드는 반란군들과 1552년 파싸우 휴전조약을 맺고, 1552년 9월 25일 아욱스부르크 종교화의를 체결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제후의 종교는 그 국민의 종교:제후들은 자유롭게 새로운 종교를 선택할 수 있지만 그 휘하의 신하나 그 영지에 사는 백성들은 제후의 종교를 따라야 한다. 따르지 않으려면 자기의 재산을 처분하고 다른 지역으로 이사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한다. (2)성직 유보조건:1552년 이후 가톨릭을 떠난 성직자령의 현직 제후 주교나 대수도원장들은 그들의 재산을 상실하게 된다. (3)페르디난드 포고:이미 아욱스부르크 신조를 받아들인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의 기득권을 인정한다는 내용으로 프로테스탄트와 비밀리에 약속하였다.
계속적인 전쟁으로 극도로 피곤해진 카알은 이듬해에 자기 동생인 페르디난드와 아들인 필립에게 제국을 양분하여 양도하고 스페인의 한 수도원에 손님으로 은퇴해 지내다가 2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아욱스부르그의 종교화의는 표면상의 분쟁을 해결했다고 하지만 차후 더욱 격렬한 종교전쟁의 씨앗을 안고 있었다. 가톨릭 교회의 쇄신과 혁신으로 일부 프로테스탄트 지역들이 가톨릭으로 다시 돌아오자 프로테스탄트의 반항으로 종교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화의는 아직도 당시의 종교에 의한 지리적인 경계선을 고정되게 하였다. 백성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제후들에 의해 선택되어 강요된 종교 분계선을 아직도 당연한「신앙의 유산」으로 여기고 있다. 인간적인 체면과 자존심을 주님의 지상명령이자 유언인 사랑 안에서의 일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한 일치의 축복은 아직도 멀 뿐이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