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 전 이맘때쯤 빠리의 시떼섬 생샤뻴의 문을 나오면서 나는 순례의 지팡이를 어디엔가 내던지고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으로 되돌아서고 말았다. 아니 되돌아서고 싶었다는 표현이 더 정직할 것 같다. 매달 신문 한 면을 채워야 하는 중압감에서 해방된 기분을 만끽하지도 못한 채 한 해를 보내버렸는데 어느새 또 다른 봄을 맞았다. 봄의 불길한 예감처럼 나는 누군가의 손에 다시 붙잡혀서 성미술의 순례를 계속하게 되는 운명으로 되돌려지고 말았다.
빠리 서남쪽 87km에 위치하고 있는 샤르뜨르는 참으로 고즈넉하고 차분한 마을이다. 아침 안개가 낀 무렵이나 황혼녘에 지방 도로를 타고 이 마을을 찾는 사람이면 누구나 마음 속에 깊이 새겨지는 광경이 있는데 그것은 대평원에 랜드마크처럼 솟아있는 샤르뜨르 대성당의 서로 다르게 보이는 두개의 첨탑이다. 그것은 빠리 근교의 끝없이 풍요로운 평야지대의 광활함과 대비된 채(샤르뜨르 30km 전방에서도 볼 수 있다) 거룩한 상징처럼 그렇게 가만히 서 있는 것이다. 특히 해질 무렵 이러한 정경은 샤르뜨르와 동남쪽으로 반대편 거리에 있는 바르비죵(Barbizon)의 농촌정경을 그린 쟝후랑소와 밀레의 그림 「만종」을 새삼 떠오르게 한다. 갈리아 전기를 쓴 시저의 기록에도 나와있는 것처럼 샤르뜨르는 기원 전 옛날 켈트족이 이곳을 경작할 당시에도 신성시되었던 것 같다. 그리스도교가 들어오기 전 샤르뜨르에는 이교도들이 만든「아기를 가진 젊은 여인」에게 바쳐진 금단의 지성소가 있었는데 나중에 이 지역에 정착한 교회는 이것을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는 전조로 해석하였다. 대략 6세기경에 성모 마리아께 봉헌된 교회가 세워지고 나서 정식으로 성모 마리아 성당으로 명명된 것은 8세기경이었다. 876년 대머리왕 찰스가 샤르뜨르에 와서 세 번째 지은 성당의 낙성식에 참가하면서 귀중한 성유물인「성모 마리아의 베일」(일설에 의하면 아기 예수 탄생시 입고 있었던 옷으로 전해 내려옴)을 바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샤르뜨르는 전 유럽인들의 순례지가 되기 시작하였다. 1020년 성모 마리아 성당이 화제로 전소되자 성 훌베르(St. Fulbert, 960~1028)는 건축가 베렌거(Berenger)에게 재건을 명하여 오늘날 우리가 보는 성모 마리아 대성당의 토대가 구축된 것이다. 이런 연유에서 서쪽 정면을 성 훌베르의 정면이라고도 부르는데 1134년 다시 마을에 화재가 나 최초의 손상을 입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145년경 쉬제 대수도원장을 도와서 생드니 수도원 건립에 참여하였던 샤르뜨르의 주교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샤르뜨르의 대성당을 새롭게 개축하기 시작하였다.
1150년과 1960년에 북쪽 종탑이 완성되었고 그 사이에 서쪽 정면도 완성되었다.
샤르뜨르 대성당은 불과의 싸움이자 신앙의 승리이다. 1194년 6월 10일 대화재가 일어나 종탑과 성 훌베르의 정면, 그리고 지하 성당만 남기고 로마시대부터 내려온 옛 교회의 흔적 모두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성모 마리아의 베일은 무시무시한 대화재 속에서도 무사하였던 까닭에 사람들은 이것을 기적이라 하며 유럽 각지에서 성당을 다시 재건키 위한 건축 자제와 노력봉사가 줄을 잇게 되었다.
이는 샤르뜨르를 성모님의 집으로 생각하였던 당시 사람들의 신앙에 비추어 볼 때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모든 계층과 모든 지역에서 헌신적인 유지들이 참여하였다. 심지어는 병자들과 빈민들조차도 매일매일 일상의 기도와 희생을 대성당 재건에 바쳤던 것이다.
재건공사는 불이 나던 해 곧바로 시작되었다.
1215년에 대성당의 본체가 완공되었고 1220년에는 지붕공사가 끝났다. 1260년 대성당의 헌당식은(화제가 난 지 실로 66년 만에 거행된) 신앙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하여 전국에서 모여든 성직자와 귀족 그리고 모든 계층민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유리화를 동시에 갖게 된 샤르뜨르 대성당 색유리는 프랑스 왕실이 기증한「프랑스의 장미」라 명명된 북쪽의 장미창뿐만 아니라 모피 상인들이 기증한「샤를르마뉴의 창」과 구두장이들이 기증한「착한 사마리아인의 창」등으로 명명되어 있다. 이 밖에도 빵장수 조합, 물장수까지도 창을 기증하는 정말 문자 그대로 하느님의 백성이 지은 하느님의 집이자 성모님의 집이 되었던 것이다.
대성당 남쪽의 주차장에서 차를 세우고 정면으로 다가가 본다. 정면의 1층 부분은 지금도 불길이 닿인 흔적이 생생하다. 불에 그을린 석회암처럼 석상들은 연한 적갈색을 띄우고 있다. 바로 성 훌베르의 정면으로 불리우는 이곳은 천년의 대화재와 역사의 수난을 이겨내고 살아남아 순례객들을 숙연케 하는 장소이다. 정문에는 돌에 조각된 성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3개의 문설주 위에 서 있는 인물상은 모두 구약성서의 등장 인물들로서 왼쪽 문 위의 막힌 아취 부분(Tympanum)에는 그리스도의 승천이, 중앙 팀파눔에는 네 복음사가들로 상징되는 짐승들과 함께 위엄 넘치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오른편 팀파눔에는 그리스도의 탄생이 각각 조각되어 있다.
널빤지를 세로로 대고 중간 고정 테두리 쇠를 운치 있게 박은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 원초적인이라는 말을 순간 떠오르게 하는 명상의 순간이 다가온다. 대성당 안에 발을 들여놓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찬탄해마지 않는 빛과 색유리가 빚어내는 장엄의 세계가 눈 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 바로 순례객들은 7세기 전 축성미사 때 낭독된 문구와 같은 감탄에 도달한다.
『대성당은 경외로운 땅이며, 신의 법정이며, 천국의 문이다』
샤르뜨르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여느 다른 성당의 것과 달리 보이는 이유를 살펴보자. 그것은 빨강 노랑 파랑이라는 원초적 주조색의 사용이다. 색유리는 용해된 유리에 금속의 산화물을 섞어 착색하면서 만들어진다. 구리를 섞으면 빨간색이, 철을 넣으면 노랑, 코발트를 혼합하면 청색의 유리가 된다. 여기서 공기 기포를 넣는 방법으로 빛을 더욱 찬란하게 산란시킬 수 있다. 유리를 연결시키는 재료는 일반적으로 납선을 사용하고 보다 큰 창들은 굵은 구리편으로 보강한다. 성상을 그린 인물화에는 명암을 넣게 되는데 잿물(Ember)을 완성된 유리 면에 부어 적절히 긁어낸 다음 유리와 함께 다시 굽는 열 처리를 거친다. 고 이남규 화백이 복원한 명동 대성당의 유리화도 이와 같은 과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다시 대성당의 색유리에 눈길을 돌리자 방금 들어온 서쪽 정문에 걸린 최후의 심판을 주제로 한 장미창은 13세기 상드니 수도원의 색유리 공방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보다 한 세기 앞서 만들어진 아래 수직으로 난 세 개의 아취형 창을 살펴보면 오른쪽의 것이 이새의 나무가지창(Jcsse’ s Tree)이고 중앙의 것이 그리스도의 탄생에서 예루살렘 입성까지의 일대기를 그린 것이다. 왼쪽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보여주는 문자 그대로의 클리어 스토리( Clearstory:중세 때 신자 대부분이 문맹인이었으므로 색유리나 회화, 조각들로 성서 이야기를 표현한 것에서 유래된 건축 용어-색유리 창 부분을 가르킴)로 가득 차 있다.
대성당에서 가장 아름다운 북쪽「프랑스의 장미창」은 13세기의 것으로 빠리의 노뜨르담 대성당 공방의 작품이며 자세히 보면 중앙에 성모님이 무릎에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 밑에 다섯 개의 창은 왼쪽부터 설명하면 제사장 멜키세덱과 느부갓네살, 다윗과 사울, 마리아를 안고 있는 안나, 솔로몬과 여로보암, 아 아론과 파라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옥좌에 앉으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오색 영롱한 비눗방울이 퍼져나가다 굳어버린 형상의 남쪽 장미창 아래에 있는 유리화의 주제는 이 색유리를 기증한 드리 백작 가문의 가족 초상이다. 이곳을 지나쳐서 제단쪽으로 조금 옮겨 가노라면 남쪽으로 면한 창에 그 유명한「색유리의 성모」(The Virgin of the Beautiful Window)가 발길을 멈추게 한다. 12세기 초 상드니 수도원 공방의 걸작이요 유리화의 완성 그 자체를 고스란히 우리가 볼 수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 아닐까?
샤르뜨르 성당의 순례는 이곳에서 발길을 돌려야 한다. 혹 호기심에서 후진(APSE)이나 성단(Chancel)으로 가지 말기를… 왜냐하면 그곳은 어처구니 없게도 17세기의 유치한 매너리즘의 조각들이 거룩한 장소를 차지하고 있어 모처럼의 묵상을 깨뜨리기가 십상이기 때문이다.
혹 남쪽 문이 열려져 있나 살펴보니 마침 열려진 문으로 한 무리의 푸짐하고 인심 좋게 생긴 부인네들이 성호를 긋고 들어오고 있었다. 대성당을 빠져나와 발길을 돌려버린 후진쪽 지붕 위를 쳐다보니 지팡이를 든 천사가 하늘을 배경으로 위태롭게 서 있다. 이 청동제의 천사 역시 1836년의 화재 때 목조 지붕틀과 함께 천국으로 날아간 후 다시 세워진 것이다. 우째 그리 불이 잘도 났는지… 혀를 끌끌 차며 발길을 돌린다. 비 오는 날의 우산이 인상적이었던 쉘브르로 갈 것인가 아니면 몽생 미쉘로 갈 것인가. 노르망디의 소금기를 흠뻑 맛보려면 우선 깡(Caen)으로 갈밖에… 가자! 피에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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