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별남 작가의 ‘빗개’. 그는 “소설 「순이삼촌」으로 유명해진 북촌의 너븐숭이 옆 서우봉 아래 일본군 진지에서 바라보는 다려도는 더 이상 도망칠 곳 없는 이들의 맨바닥이었다”고 말했다.
“토벌대든 무장대든 언제 누가 쳐들어올지 몰라 무서운 마음으로 숨어서 망을 봅니다. 어릴 때니까, 지루해지면 저도 모르게 주변에 풀꽃도 건드려보고 돌담에 기대 하늘도 올려다보곤 했죠. 그러다 새가 날아오르는 작은 기척에도 소스라쳐 놀라지요.”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유별남(레오폴드)씨가 채록한 ‘빗개’ 인터뷰다. 유 작가는 70년 전 제주에서 일어난 제주 4·3 사건(이하 4·3)의 올바른 내용을 알리기 위해 카메라를 들었다.
‘빗개’는 제주도에서 어린 소년소녀들을 부르던 말이다. 하지만 그의 사진전에서 빗개는 4·3 당시 토벌대와 무장대를 피해 제주 땅 곳곳에 몸을 숨긴 주민들이 은신처를 지키고자 망보기로 세웠던 아이들이다.
유 작가는 생존한 빗개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듣고, 기록된 자료 등을 바탕으로 당시 풍경과 상황을 떠올렸다. 이어 빗개처럼 그날의 역사적 현장에 다시 섰고 빗개가 바라본 그곳을 사진에 담았다.
이번 전시에서는 빗개의 시선에서 바라본 제주의 모습을 촬영한 작품 30여 점을 선보인다. 70년 전 참혹한 학살이 벌어졌던 제주 다랑쉬굴, 도틀굴 숲속, 정방폭포 물살 뒤에서 망보는 소년의 시선 등을 따라간 작품들이다. 유 작가는 특히 정치나 이념에 상관없이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는 아이의 시선으로 당시 제주의 모습을 바라보고 사진으로 승화시켰다.
아끈다랑쉬를 담은 유별남 작가의 ‘빗개’. 아끈은 제주 말로 ‘작은’이라는 뜻이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곳은 4·3의 아픔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다. 다랑쉬굴에서는 1948년 하도리, 종달리 주민 11명이 피신해 살다가 발각돼 희생당했다. 너븐숭이는 제주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마을로, ‘북촌리 학살’의 참상을 알리는 대표적인 곳이다. 이곳은 소설 「순이삼촌」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이번 전시는 유 작가 스스로의 물음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중학생 때 그는 할아버지에게 4·3 사건에 대해 물었다가 회초리로 맞고 대문 밖으로 도망쳐야 했다. 그런 그에게 할머니는 “다시는, 다시는 그 얘기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왜 그랬을까. 그는 그 답을 빗개의 시선에서 찾았다. 유 작가는 “편 가르자는 이야기다 아니다”라면서 “4·3으로 인해 평범한 이들이 이유 없이 죽어가고 아픔을 당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유 작가는 지상파 TV 세계 테마 기행 프로그램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이름을 알렸다.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 해마다 한두 번씩 파키스탄, 이집트, 남아프리카, 몽골 등 다양한 나라를 여행해왔다. 특히 그 여정 중에 길어 올린 이야기를 사진으로 표현해 관심을 모았다. 유 작가는 보다 많은 이들에게 난민들이 겪는 어려움을 알리고자 눈앞에서 폭탄이 터지는 지역을 찾아가기도 했다.
제주교구 부교구장 문창우 주교의 말처럼 “제주 4·3에 내재된 한은 제주도민들만의 현실이 아니라 하느님의 눈길이 머무는 현실이며 하느님과 인간이 만날 수 있는 역사적 장”이다. 그는 사진 작업을 하며 항상 ‘하느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을 걷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주님 눈길이 머무는 곳을 카메라에 담은 이번 전시는 그런 그의 기도에 대한 답과도 같다. 전시는 4월 22일까지 서울 자하문로 류가헌에서 열린다.
※문의 02-720-2010 류가헌
성슬기 기자 chiara@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