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사망으로 어쩔 수 없이 가장의「멍에」를 짊어진 용수(15세)는 소년소녀가장이다. 그러하듯 처음부터 한 가정을 이끌어야 하는 가장은 아니었다.
올해 76세의 할머니와 동생 인수(13세), 셋이서 서울 관악구 봉천동 일명 달동네에 살고 있는 용수가 가장이 된 것은 지난 91년. 술 주정이 심한 아버지의 구타를 이기지 못한 어머니가 가출하고 곧바로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국민학교 5학년인 용수는 힘에 겨운 소년소녀가장이 됐다.
엄마 아빠에게 응석을 부려야 할 나이지만 졸지에 가장이 된 용수군은 이미 자기 또래의 아이들과 사뭇 다른 삶을 살게 됐다.
학교를 마치자마자 몇 곳의 학원을 전전하는 친구, 주일이면 시내 백화점이나 서울랜드에 다녀왔다며 자랑하는 친구들이 있는 반면 용수는 매일매일을 철없이 보채는 동생을 달래고 당장 먹을 찬거리를 걱정하는 애어른이 돼야 했다.
◆전국 7천 백여 명
자신을 지칭하는 소년소녀가장이라는 긴 이름이 귀에 거슬릴 만큼 현실을 거부하며 또 부정하고 싶지만 문득 자신의 처지를 발견할 때마다 언제나 울음으로 대신해야 하는 용수와 같은 소년소녀가장은 전국적으로 7천1백여 명에 달한다.
92년 말 보사부 통계에 따르면 20세 미만의 소년 소녀 중 실질적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소년소녀가장 가구는 7천89가구이며 가구원 수는 1만4천81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소년소녀가장이 발생하는 원인을 유형별로 보면 부모 사망이 전체의 48%(3천4백9가구)에 달하고 부모의 행방불명이나 가출 28%(1천9백99가구), 이혼 및 재혼 15%(1천76가구) 등의 순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부모의 이혼이나 재혼으로 소년소녀가장이 되는 경우가 큰 폭으로 늘어나고 있어 소년소녀가장의 발생이 한 가족의 문제로만 국한될 수 없다는 지적이다.
이것은 곧 부모와 자녀간의 애정과 양육에의 의무 등을 바탕으로 한 우리 사회의 전통적인 가족관이 무너지는 한 단면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지적과 함께 자녀를 생각하지 않는 부부 이기주의의 부산물로 풀이되고 있다.
◆정책도 유명무실
이혼 소송시 자녀 양육을 서로 맡겠다던 시대에서 자녀를 맡지 않기 위해 별도의 소송을 제기하는 사회 추세에서는 소년소녀가장이 양산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 가정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유엔에서는 금년을「세계 가정의 해」로 제정한 바 있으며 우리나라도 이에 발 맞춰 가정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실제로 정부 관련 기관에서는 정상적인 가정의 중요성에 주안점을 둔 반면 소년소녀가장과 같은 관심이 필요한 대상에게는 별다른 배려나 대안이 없는 상태다.
청소년 복지단체의 한 관계자는『정부에서는 소년소녀가장들에게 생활비를 몇천 원 더 올려주는 데 생색을 내고 있을 뿐 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한다거나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고 지적한다. 그나마 정부에서 이들에게 생계 보조비로 1인당 월 7만 원 정도를 지급하고 있지만 생활비에는 크게 미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소년소녀가장들에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잃어버린 그들의 정을 찾아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모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하고 있다.
갑자기 단절된 부모의 사랑, 주위의 무관심은 호기심 많은 청소년들을 비행으로 치닫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기 때문이며 결국 결손가정의 어린이가 비행청소년이 되는 악순환을 되풀이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 고리를 끊어주는 역할을 교회가 맡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서울 가톨릭 실업인회(회장=장덕진) 등에서는 소년소녀가장들과 자매결연을 맺고 학비와 생활비를 정기적으로 제공하고 있어 그들이 용기를 잃지 않고 살아가는 데 많은 보탬이 되고 있다.
경제적 지원과 함께 교회 내 복지 관계자들은 소년소녀가장들이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교회가 중심이 되는「대리모」와 같은 결연제도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아울러 강조한다.
◆월 생활비 7만 원
서울 가톨릭 사회복지회 성가정입양원(원장=김영화 수녀)에서 몇 년 전부터 펼치고 있는「사랑의 부모운동」을 대표적인 제도로 꼽고 있는 복지 관계자들은「사랑의 부모운동이야말로 가장 교회적이고 모범적인 사랑 나눔」이라며 이 운동에 많은 신자들이 참여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사랑의 부모운동」은 부모의 이혼이나 가출 질병 빈곤 등으로 더 이상 부모가 자녀를 양육하기 어려울 때 아이를 데려다 키운 다음 부모의 능력이 회복되거나 상황이 좋아졌을 때 아이를 되돌려주는 방법이다.
사랑의 부모운동은 아직 크게 확산되지 않았지만 신자 가정을 중심으로 점차 이 운동에 동참하려는 가정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소외감 극복 과제
또한 각 본당은 관할지역 내의 소년소녀가장의 현황을 파악, 경제적인 지원과 정신적인 도움을 주는 데 보다 적극적인 관심을 쏟아야 할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교회의 진정한 복음 선포는 이들을 내 이웃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교회의 세포조직이자 작은 교회인 가정을 살리자는 운동이 곳곳에서 불고 있지만 정작 사랑의 손길이 필요한 소년소녀가장에게는 아무런 파장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
결국 그들은 우리 모두의 이기주의가 빚어낸 아픔인데도 우린 그들의 아픔을 모른 채 살아 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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