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년 1월 15일
「순교자의 모후」꾸리아에서 나의 출발에 앞서 송별회 해준다며 레지아 간부 4명과 우리 부부를 초청했다. 블루르에 있는 식당에 도착하니 벌써 모두들 도착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도로 시작된 연회는 시종 화기애애하게 진행됐다. 아틀랜틱시티 지역의 지도를 그려놓고 체리힐과 필라델피아, 뉴욕, 워싱톤 DC까지 순방하며 활동할 계획을 설명했다.
남 단장은 나의 아내에게『1년간이나 남편과 떨어져 생활하기를 각오하고 이 일에 동의하기까지는 상당한 마음의 갈등과 고민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동의하기까지의 마음을 얘기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아내는 결혼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의 신앙생활에 대해 언급하면서『남편이 너무 지나치다 할 정도로 활동을 할 때는 차라리 내가 냉담해 버릴까 하고 생각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답했다.
계속해서 아내는『1990년 7월 이태리 성지순례에 참가, 토리노를 방문했을 때 예수님의 수의에 새겨진 주님의 성안을 뵙고 그 자리에서 주님의 고통을 묵상하면서 결심한 바가 있어 동의했다』고 덧붙였다.
당시 아내는 묵상 중에, 앞으로 남편은 반드시 집을 떠나 장기간 주님사업을 위해 일할 것이라고 예측했으며 미주지역뿐만 아니라 북한, 중국, 시베리아까지라도 주님사업에 불림을 받고 떠난다면 기꺼이 동의하고 뒷바라지 해주겠노라고 다짐했다는 놀라운 얘기를 해주었다.
모두들 아내에게 박수를 치며 칭찬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또 아내는 나에게도『당신은 1년 동안의 인꼴라 마리애 기간에 성인이 돼 돌아오고, 나는 국선도 도사가 돼 다시 만나자. 애들이 성장해 자립하면 당신 가는 곳마다 나도 동행하며 당신 뒷바라지 하는 것으로써 주님사업에 동참할 것이다』라는 놀라운 말을 해 나를 감격시켰다.
■92년 1월 17일
어제는 준비가 미흡해 출발을 하루 연기했다. 어제 밤 늦게 최홍길 신부님으로 부터 나의 출발일 확인 전화가 걸려왔다. 오늘 새벽에 출발한다고 말씀드렸다.
그러나 새벽부터 내리치는 폭풍과 폭설로 또 하루를 연기해야만 했다. 종일토록 식음을 전폐한 아내가『12시간 운전길이 힘들고 고달프리라는 것을 누가 모르겠어요? 왜 동행하고 싶지 않겠어요. 그러나 따라갔다가 당신만 두고 돌아서는 안타까움, 설움을 어쩌란 말이예요. 꼭 이렇게까지 해야만 올바른 레지오 단원이며 신자가 되는 것이예요?』라고 절규하는 모습을 보니 심장에 비수를 맞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아내한테로 다가갔으나 아무 말도 해줄 수가 없었다. 한참만에야 그녀의 손을 감싸쥐며『여보, 사별해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부부가 주위에 얼마나 많소. 그러나 그들은 주님께 더욱 가까이 나가 그분만을 의지해 열심히 살고 있지 않소. 그저께 밤 레지아와 꾸리아 간부들 앞에서 그토록 강인한 모습을 보여놓고 이게 웬 말이요. 이번 1년간은 우리 생애에 가장 소중한 나날들이 될 거요. 당신과 나 사이에 계신 주님, 성모 마리아의 더 크신 은총과 사랑으로 새로 태어나는 부부가 될 것이요. 당신 소원대로 애들 다 자란 후에 한국으로 돌아가 더욱 보람된 삶을 누릴 수 있지 않겠소』라며 위로했다.
아무리 달래도 아내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이제 내일은 내가 분명히 떠난다는 것을 알기에 저토록 서러워하고 비통해하는 것이다.
아내의 저런 모습을 보니 언젠가 주님 다음으로 나를 사랑한다는 그녀의 말이 새삼 뇌리를 스쳤다. 아내의 깊은 사랑에 감사할 뿐이다. 금요일 밤 장남 재민에게 뒷일을 당부하면서 특히 너희 어머니를 잘 보살펴드려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하고 잠이 올 것 같지 않아서 밤 늦도록 묵주의 기도를 바쳤다.
■92년 1월 18일
드디어 인꼴라 마리애 기사로서의 생활이 시작되는 날이 됐다. 아침 6시에 일어나 떠날 채비를 끝내고 아침식사 후 아내와 아이들의 전송을 받으며 차에 올랐다. 몹시도 추운 정월의 새벽이었다.
『지금부터 정말 1년간 외지에서의 생활이 시작되는가』라는 생각에 공연히 가슴이 두근거리며 떠나올 때까지의 과정들이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가 새로운 감회에 젖어들었다.
새벽 동이 트고 세찬 폭풍을 헤치며 나아가니 어느새 나이가리아까지 왔다. 국경에 있는 세관원들이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고 온 차 안을 검사했다. 아무리 뒤져도 성서를 비롯한 영신서적과 섹소폰, 병풍뿐이니까 급기야 찹쌀 한 포 실은 것을 빼앗아가고 통과시켜 주었다.
초행길이라 주유소에서 정확한 방향을 물으려고 차를 세워 문을 여는 순간 너무나 세찬 바람이 몰아쳐 엉겁결에 키이를 꽂아둔 채 문을 닫았다. 다시 문을 열려고 철사를 구하러 30여분을 뛰어다녔더니 체감 온도가 영하 30℃나 되는 추위가 나의 온 몸을 꽁꽁 얼려 놓았다.
가스를 주입하러 오는 차를 발견하고 철사를 얻어 간신히 나의 차문을 열고 들어가니 코가 맹맹해지고 감기 기운이 엄습해왔다. 정확히 가고 있는 길을 너무 정확하게 가려다 괜한 고생을 한 셈이었다. 허기가 느껴져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펼치니 집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불쑥 솟아났다.
겨우 성당 내 사제관에 도착하니 밤 7시 35분이었다. 근 12시간이 소요된 대장정이었다.『아이고 수고 많으셨지요, 아이고 고생 많이 했지요』언제나 쓰시는 특유의「아이고」와「아참」으로 최 신부님께서 반가이 나를 맞아주셨다. 기다리다가 궁금하시어 토톤토로 전화까지 하신 모양이었다.
아내가 무척 궁금해 할 것 같아 전화를 했다. 아내의 첫 마디『결국 해내셨군요. 드디어 도착하셨군요. 너무 무리했으니 한 이틀 푹 쉬세요』하며 걱정을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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