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기도는 본래 루가 복음에서처럼「아버지」하고 시작된다. 예수의 기도의 가르침은 우리가 하느님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가르치고 있다:우리는 그분을「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 아주 친밀하고도 가족적인 이 호칭을 우리가 사용한다는 것은 결코 당연스런 일이 아니다. 이 호칭은 주의 기도문의「영혼」이며 또한 청원 하나하나의「영혼」이기도 하다.『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호칭은 단지 기도의 제목이 아니라 기도 전체를 한마디로 말해 주고 있는 호칭이다. 즉 우리가 주의 기도문 안에서 청원기도를 한 가지씩 드릴 때마다 비록 소리 내어「아버지」하고 반복하며 부르지는 않지만 마음 속에는 생각하자며 거듭 반복해 부르는 것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내가 중대한 편지를 쓰려 할 때 상대방과의 관계를 생각하고 선택하여 상용하는 호칭과도 같은 것이다. 그 호칭 안에 이미 내용 전체가 숨겨져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예수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하느님의 이름을 부른 것이 아니라 그분의 가장 내면적인 아버지이심의 근본을 표현한 것이다. 예수는 하느님과의 대화 속에서 그 당시 아무도 하느님을 그렇게 부르지 않았지만-아주 친밀하고 가족적인、즉 어린 아이가 부르는 칭호로 아빠(abba),「사랑하는 아버지」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으셨다. 보통 아이가 아버지를 부를 때 이름을 부르지 않고 그냥「아버지」라고 부르듯이 이 호칭은 아주 친밀하고 은근한 사랑스런 신뢰관계를 말해주고 있다. 예수는 친히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면서(주의 기도에서만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셨다.
아라메아어로 아버지를「abba-아빠」라고 부르는데 이는「나의 아버지」혹은「우리 아버지」와 같은 뜻이다. 예수가 하느님을「아빠、아버지」라고 부르신 것은 하느님께 대한 예수의 친밀하고도 전적인 신뢰를 드러낸 것이다. 제자들이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언제나 우리의 행복을 원하고 도와주려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야만 했다. 예수가 이처럼 제자들에게 새로운 하느님의 관계를 보여주신 것은 예수의 가르침의 가장 내면적인 중심에 속하는 것이다. 예수가 전한 소식에서 가장 내면적인 내용은 바로 하느님이요 그분의 구원 의지이다. 예수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도(마르코 14、36) 하느님을「아빠」라고 불렀다. 우리나라에서도 어린 아이들이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르기 때문에 아빠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 어느 누가 감히 하느님을 그렇게 불렀다. 예수가 어린 아이처럼 순박하게 하느님을「아빠」라고 부른 데서 우리는 다만 하느님과 예수 사이에서의 친밀한 부자관계만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보다 예수가 아버지로부터 파견 받은 자로서의 깊은 사명의식과 신비가 드러나고 있음을 또한 알 수 있다. 예수는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전폭적으로 하느님을 알 수 있는 선물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예수가 그 아버지 하느님을 어린 아이처럼 친밀한 호칭으로 부른 것은 바로 그의 메시아적 특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예수는 주의 기도에서 제자들에게도 당신을 따라 하느님을『아빠、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치셨다. 그래서 제자들도 당신처럼 하느님께 마치 어린 아이가 그의 아버지에게처럼 사랑과 신뢰를 가지고 친밀하게 사귀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하셨다.
우리가 기도를 시작할 때에 신뢰 가득한 마음으로 자신을 아버지처럼 신뢰하면서『사랑하는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하기를 원하신 것이다. 예수는 오실 하느님과 가까운 종말을 대망하는 것만이 아니라 먼저 아버지를 우러러 쳐다보기를 가르치셨다. 그러므로 제자의 기도는 미래를 위해 간청하기 이전에 우선 아버지를 부르고、오실 주님을 기다리기 전에 먼저 현존하시는 아버지의 얼굴을 찾아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런 새로운 하느님의 관계는 바로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길을 열어주는 문이기도 하다.『너희가 생각을 바꾸어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며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오 18、3)
「아빠」라는 단어 저변에는 은근하고도 친밀한 관계、또 티없이 맑고 불신의 여지가 없는 신뢰가 전제하고 있다. 이처럼 어린 아이와 같은 신뢰와 사랑을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를 찾을 수 있고 또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로마서 8、15과 갈라디아 4、6에서 사도 바오로는 어떤 사람이 하느님을「아빠、아버지」라고 부른다면 이것은 그 사람이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이며 또한 그분의 성령을 모시고 있다는 징표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는 그토록 삼가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주의 기도를 바친 것이 아닐까.
◆「아버지」의 상징
우리는 아버지들을 알고 있다. 어떤 아버지는 사랑과 이해가 가득하고 어떤 아버지는 거칠고 지배적인가 하면 자녀들에게 요구만 하는 아버지도 있다. 자유를 주는 아버지가 있는가 하면 다른 이들을 자기 방식대로 강요하는 아버지도 있다. 그렇다면 과연 하느님이 우리 인간 아버지들과 같으시단 말인가. 우리가 하느님의 상징을「아버지」로 들어 높여 부른다는 것은 곧「아버지」에 대한 반대되는 상징을 시사하고 있다. 즉、우리 삶의 의미와 모든 희망의 구원은 우리가 알고 있는 실제에서부터 그리고 거울을 들여다보는 눈빛에서부터 생기는 것이 아니고 어떤 삶이 풍요로운 삶인지、행복한 삶인지에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기에 우리는「하느님、우리 아버지」하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이름、상징、아버지의 상은 우리 눈 앞에 있는 것들을 초월한 세계와 생을 위해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체험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특히 아버지에 대한 근원적 체험은 문화ㆍ종교 역사의 체험들로써 여러 문화와 종교 안에서 다양한 모습과 강도로 나타났으며 오늘날까지 계속 나타나고 있다.
내가 아버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내 근원、신원을 말해주고 있다. 아버지는 내게 생명을 주었고 나를 받아들였고 내 삶을 보호하고 기르는 분이며 또한 자유로이 아버지의 역할을 맡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아버지、좋은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위에서 열거한 그 이상의 것이 전제되고 또한 요구된다.
무엇보다 우리가 하느님을 좋은「아버지」로 부를 수 있으려면 나를 낳아준 아버지 에대한 좋은 체험들은 전제로 한다. 인간-아버지에 대한 부정적인 체험들로 인해서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지 못하는 사람들、더 나아가서는 자비와 용서의 하느님、사랑의 하느님을 믿기 어려워하는 사람들을 나는 종종 만난 적이 있다. 이처럼 우리는 인간을、특히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좋은 체험들을 통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다 쉽게 깨달을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으며 감사、자비、용서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한 그리스도인이기 전에 진실한 사랑과 용서、전폭적인 신뢰의 체험들을 통해서만 비로소 원만한 삶과 사랑 신뢰、용서의 삶이 가능한 것이다.
아버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녀만이 아버지의 마음과 뜻을 헤아릴 줄 알고 또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는 최상의 선물임을 알 수 있다. 그처럼 우리도「하느님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할 때 그분의 뜻을 헤아릴 줄 알게 되고 또한 실천하는 기쁨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을「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하느님이 마치 아주 좋은 아버지처럼 혹은 아주 좋은 어머니처럼 내 삶과 모든 이의 삶을 원하고 인정하는 분이심을 믿는 것이다. 하느님은 내 삶에 의미를 주고 내 앞길을 사랑으로 돌보시며 인도해 주시는 아버지이시다. 하느님을「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내가 그분의 어린 아이임을 고백하며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어린 아이로서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다. 아버지께 대한 예수의 믿음과 신뢰가 그분의 삶에 큰 의미를 주었고 예수가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셨던가를 알게 하셨듯이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과 신뢰는 역시 우리 삶에 큰 의미를 줄 것이고 우리의 존재 이유를 또한 알게 해줄 것이다:『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행하는 것이 내 양식이다』(요한 4, 34). 예수의 삶의 의미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위한 열려진 마음이었다. 그 마음은 온전히 인간의 구원을 위한 마음이었다.『아들을 보는 사람은 아버지를 보는 것이고、아들 안에서 아버지를 알 수 있다』(요한 14、10 이하). 예수는 아버지로부터 보내진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아버지와 더불어 산다면 내 삶에서 아버지를 볼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예수는 우리에게「당신의 아버지」를「우리의 아버지」로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인간적인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감히 하느님을「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하느님을「아버지」라 부르는 우리 모두는 한 아버지를 모신 형제들인 것이다. 이 얼마나 하느님의 크신 사랑의 선물인가! 이 얼마나 감사롭고 보배로운 선물인가!
◆하늘의 상징
하늘의 상징은 곧 아버지의 상징이다. 하늘에 계신 하느님께 대해 말한다는 것은 어떤 인간적인 비교로도 충분치 못하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실재는 모두 한계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은 먼 곳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가리킨다.「하늘 」과「아버지」의 상징은 합치되며 따라서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을 하늘에 새기고 온 세상에 그분의 이름을 외치는 사람은 이 세상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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