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혁명의 시기
1520년 12월 10일 비텐베르그에서 루터가 교회 법률서와 파문 위협의 칙서를 공공연하게 소각하고、1521년 1월 3일 그에 대한 파문이 로마에서 정식으로 내려지면서 그의 개혁운동은 새로운 양상으로 진전되었다. 이후의 진전 상황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 사회혁명의 혼란 시기(1521~1525)、문제 해결을 위한 회의와 대화의 시기(1525~1532)、그리고 황제와 제후들의 투쟁과 영향을 끼친 정치적인 상황에 대하여 미리 살펴보는 것이 이후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유익하리라 본다.
프랑스 왕 프랑스와 1세와의 격렬한 선거 투쟁 끝에 합스부르크 왕가의 후예인 막시밀리아누스 1세(1493~1519)의 손자가 1519년 독일 황제로 선출되었는데 그가 바로 카알 5세이다. 교황은 이탈리아 남북으로 교황령을 에워싸고 있는 스페인 소유의 영토도 마음에 걸리고 또 이탈리아에서 합스부르크 가의 세력이 커지는 등、황제의 과도한 권력을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교황은 그 가문에서 황제로 선출되는 것을 반대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의 개혁 지지 세력들은 카알 5세로부터 반 교황청적인 정치를 기대하며 그를 열렬히 환영하였다. 루터는 카알 5세를 하느님이 보내주신 희망의 사자로 칭송해마지 않았다. 그러나 루터의 기대와는 달리 황제는 1521년 5월 8일 보름스 제국(Worms 제국의회)에서 루터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국가적 처벌을 내리는 칙서에 서명하였다.
그러나 그의 칙서가 실행되지 않고 개혁운동이 지속되었는데、이는 카알 5세가 9년간이나 독일을 떠나 있어야 했던 국내외적인 상황 때문이었다. 즉 그는 프랑스의 프랑스와 1세와 전쟁을 치루었고 교황은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카알을 반대하고 있는 상황에서 터키인들이 끊임 없이 동유럽을 침입해오는 것을 방어해야 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루터를 옹호하고 있는 독일 제후들로부터 군사 정치적인 도움을 필요로 하였다. 따라서 루터문제의 처리에 있어서 카알 5세가 일관성 있는 태도를 보이지 못하고 강경한 징벌의 위협과 묵인하는 듯한 처신이 수시로 바뀐 것은 바로 그의 군사 정치적인 힘의 강약에 따른 결과였다.
교황이 카알 5세의 후계자인 필립 2세까지 무익한 전쟁을 하며 오랫동안 대립한 이면에는 정치적인 이유와 불신이 크게 작용했다. 교황의 입장이나 위치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황제 자신이 최고 심판관처럼 일방적으로 교회의 많은 문제들을 규정하며 지나치게 간섭한 것을 묵과할 수 없었다.
또 1527년 황제의 용병인 독일과 스페인 군인들이 로마를 침탈하여 약탈、학살、방화하자 글레멘스 7세 교황(Clemens’ 1523~1534)이「천사의 성」(Castel sㆍAngelo)에 피신해야 했던 것도 불신을 가중시킨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황제와 교황이 루터문제의 해결에 초기에 시의 적절하게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사회 혼란의 시기 초기에 사회 불안과 빈곤、그리고 종교 개혁적인 선동으로 소귀족인 기사들의 봉기가 있었다. 이들은 주교 제후령인 트리어(Trier)를 침입하여 교회 재산을 약탈하였으나 대주교와 제후들의 동맹군에 의해 격퇴되었다. 곧이어 루터의 설교와 그의 성서 해석에 자극되어 극단주의자들이 출현하여 기존 성사의 주요성을 거부하며 유아세례의 유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종교 사회적인 운동을 무력적으로 추구하였다. 이들은 재세례파라고 하는데 차후에 살펴보기로 한다.
토마스 뮨쩌(Thomas Muntzer)는 하느님 나라를 지연시킨다고 보는 제반국가、종교적인 조직을 거부하며 무정부주의적인 원칙을 주장하면서 초기교회에서 일어났던 일천 년 왕국설 이단과 비슷한 교리를 선전하였다. 그는 신을 배반한 현 당국을 절멸시킬 것을 요구하며 농민전쟁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1524년에 시작된 농민전쟁은 루터 개혁운동의 지지 세력에 큰 전환점을 가져온 계기가 되었다. 농민들은 그들의 요구를 소위「12개 조항」을 통해 알렸는데、이는 십일조 세금과 봉건 영주들의 권리를 폐지하고 본당 신부들을 민주적으로 선출할 것 등을 요구하였다. 뮨쩌와 괘쯔(Goetz)의 지휘로 출동한 농민군들은 학살과 방화로 독일 중부와 북부를 혼란으로 몰고 갔으나 곧 패전하여 2만여 명이 학살되었다.
농민 반란 초기에 루터는 농민들의 많은 요구들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고 제후들에게도 평화적으로 해결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이해관계가 상충된 상황에서 제후들이 자기들의 권익을 포기할 리가 만무했다. 루터는 농민들의 과도한 폭력성을 비난하며「잔악하고 사악한 농민 반도들을 대항하여 피로써 진압」하도록 제후들을 부추겼다.
『참고 용서할 수가 없다. 지금은 칼과 분노의 시기이지 은총의 시기가 아니다. 할 수 있는 만큼 찌르고 쳐부수고 매달아라. 죽은 채 매달아 놓아라. 이보다 더 자비로운 죽음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이후 하층의 민중운동으로서의 종교개혁은 크게 변모되어 당국의 질서와 제도 차원에서 진행되었다. 소위「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신도들」의 자유로운 신앙적인 결정에 따라 개혁이 추구되는 것이 아니라 당국이 개입하여 개혁의 내용과 방향을 좌우하였다.
루터의 설교와 개혁 원칙에 따라 여러 곳에서「신의 계시를 받은」자들이 출현하여 영적 교회를 주장하였지만、이제는 통제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래서 루터는 그의 개혁에서 거부하였던 교황권과 교계제도를 대신하여 질서와 안정을 보장하는 또 다른 권위와 제도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였다. 그가 거부한 교황의 권위는 제후의 권위로 대체되었고 그가 주장하였던 불가시적인 영적 교회는 국가교회、영방교회로 대체되었다.
교회의 최고 결정권이 교황권에서 영주의 수장권(Summenpiskopat)으로 대체되었다. 결국 그의 개혁정신에 모순되는 위험을 예견하면서도 그 대책을 국가제도에서 찾아야 하였다. 이로 인해 개혁교회는 제도화되어갔고 국가 당국에 수동적인 복종을 더욱 강요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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