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에도 어떻게 기도를 하고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가? 라고 묻는 이들이 상당히 많다. 예수는 이 기도 안에서 표현한 당신의 중대한 관심사들이 곧 우리의 관심사가 되고 나약한 우리 이간이 하느님께 우선적으로 구리고 필연적으로 무엇을 청해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계신다.「주의 기도」는 너무나 간단하고 평이해 보여 누구나가 언제 어디서나 쉽게 바칠 수 있는 기도라고 흔히들 생각하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기도의 뜻을 생각지도 않은 채 거의 습관적으로、때로는 분심 중에 입술로만 외우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우리도 초대교회 신자들처럼 삼가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바쳐야 하지 않을까? 기도의 뜻을 깊이 되새기면서 천천히 기도를 거듭 드리노라면 이 기도 내용은 우리 삶 안에서 자리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 기도가 참으로 우리 삶 안에서 은혜스런 결실을 맺게 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어 이 글을 써 본다.
「주의 기도」를 루가 11、2b-4의 짧은 형식 안에서 그리고 좀 더 확장시킨 마태오 6、9b-13에서 전하고 있다. 우리가 오늘날 교회 안에서 사용하고 있는 주의 기도는 마태오의 것과 일치한다.
우리가 주의 기도를 보다 잘 이해하려면 결코 전체에서 하나하나를 따로 떼어내어 해석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이제 두 복음을 가까이서 대조해 보며 읽어 보도록 하자. (두 복음 대조 별항)
루가가 전한 짧은 형식의 주의 기도는 아무 꾸밈도 없이 그저『아버지』하며 시작된다. 그리고 그는 오직 한 가지 원의、즉 하느님의 나라가 오기를 열망하고 있다. 마태오는 일곱 가지 청을、루가는 다섯 가지 청원을 드리고 있다. 이같이 두 복음 안에서의 주의 기도를 비교하노라면 약간은 서로가 다른 듯한 느낌을 갖게 되는데 그렇다면 과연 누구의 것이 본래의 기도문일까 하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필자는 의도적으로 여기서 어렵고 복잡한 성서적、신학적인 분석이나 해석 방법을 논하고 싶지 않다. 다만 독자들의 기도와 이해를 위해 도움이 될 것이라 여겨지는 것만을 간단하게 쓰고자 한다.
루가의 기도교리와 마태오의 기도교리가 서로 매우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즉 기도에 관한 이 두 가지 입문 교리가 서로 다른 것은 그 교리를 듣는 사람들이 전혀 서로 다른 계통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마태오의 기도교리는 어려서부터 기도하는 법을 이미 다 배운 사람(유대인 그리스도교도)들을 상대로 한 것이다. 반면에 루가의 기도교리는 이제 비로소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기도를 잘 할 수 있도록 격려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방인 그리스도교도)들을 상대로 한 것이다.
주의 기도문의 본문이 이같이 서로 다른 것은 복음사가들이 각기 제멋대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당시 자기네가 각각 속해 있던 교회에서 기도하던 대로의 주의 기도를 우리에게 전해 주었기 때문이다.
주의 기도는 당시 유대인의 기도문과 상당히 비슷한 데가 있다. 그러나 예수가 가져온 하느님의 나라가 다르듯이 전체적으로 볼 때 주의 기도도 다르다. 긴 서문이나 장엄한 결귀도 없이 형식에 있어 매우 단순하다. 더욱이 하느님의 이름과 나라와 뜻을 위한 기도가 민족주의적 성격을 띄고 있지도 않다.
제일 먼저 하느님의 이름과 나라와 뜻을 위해 기도한 다음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구하는 기도가 따른다. 이 후반부의 청원들은 극히 현실적이고 자연스럽다. 이같이 주의 기도는 단순하면서도 극히 인간적인 일상의 일들을 천사적 미래와 조화시키고 있다.
주의 기도는 이미 초대교회에서 성찬례 거행의 일부였고 신경과 함께 세례를 준비하는 예비자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들은 세례 직후 이어서 집전되는 첫 성찬례에 참여하면서 다른 신자들과 함께 주의 기도문을 바쳤다. 이같이 주의 기도문을 드릴 수 있는 특권은 교회의 성세받은 신자들에게만 주어졌으므로 이 기도문은『신자들의 기도』라고 불리워지기도 하였다.
우리는 가장 오래된 일종의 교리는 가장 오래된 일종의 교회 법규라고 이를 수 있는 교회의 옛 문헌으로서「십이 사도의 가르침」이라고 불리는「디다케」에서 주의 기도문이 이미 교회의 초창기에 정규적으로 드리는 기도에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또한 알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주의 기두를 누구든지 언제나 어디서나 쉽게 바칠 수 있는 기도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초대교회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주의 기도는 그 당시 교회의 가장 소중한 보배 중의 하나였고 따라서 그것은 교회의 정회원(신자)들에게 보유된 것이었다. 즉 주님이 친히 가르쳐 주신 기도문을 기도할 수 있음은 하나의 큰 특은으로 여긴 것이다.
초대교회 사람들이 얼마나 삼가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이 기도문을 바쳤던가를 동서방 교회의 전례에서 아직 볼 수 있는 것처럼 주의 기도문의 서문만 보아도 가히 짐작할 수 있다.『주여 우리가 기쁜 마음으로 또한 분수에 넘치지 않게 하늘에 계신 하느님 당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삼가 아뢸 수 있게 하소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서방교회에서도 로마교회의 미사 통상문에서『삼가 아뢰오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하며 기도를 시작한다.
옛 교회에서 이처럼 주의 기도를 늘 삼가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바쳤는데 오늘날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반복하며 바치는 이 기도를 과연 어떤 마음 자세와 정성으로 바치고 있는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뿐 아니라 주님 친히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이 기도를 드릴 때 그 깊은 뜻을 되새기며 입술로만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로 정성스레 바칠 수 있도록 재삼 깨어 노력해야 되지 않을까.
주의 기도는 아무도 홀로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기도할 수 없다. 우리는 이 기도 안에서 우리의 모든 일상적인 것과 더불어 삶 전체를 하느님 앞에 내어 놓는다. 그것이 날마다 필요한 양식 걱정이든지 혹은 미래에 대한 염려이든지、다른 이와 함께 살면서 생기는 어려움이나 혹은 하느님께 드리는 순수한 경배이거나간에. 그러나 이 모든 것은「나 홀로」만이 아니라 「우리가」가 하는 것이다. 그분은 바로「우리」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이 기도는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하느님이 자녀들의 공동체 안에서 바쳐질 때에 비로소 참 기도가 될 수 있다. 그것은 물론 현재 존재하고 있는 공동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에 모든 기도하는 사람들의 총체적인 기도의 힘을 말하는 것이다.
주의 기도문의 청원과 관심사는 복음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듯이 곧 예수 자신의 관심사로서 이미 옛 시편 기도 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우리의 관심사는 예수 친히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이 기도가 바로『기도-공동체』안에서 작은 사람 큰 사람간에 참된 일치를 찾을 수 있도록 참으로 가능한 많은 사람들의 진실된 기도가 되게 하려는 데 있는 것이다.
예수의 말씀이 내 삶을 좌우케 하는 사람만이 예수의 기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 누가 주님의 기도를 참으로 기도할 수 있을까? 그것은 확실히 예수의 중점적인 관심사가 자신의 내면의 관심사가 된 사람에게만 가능할 것이다. 즉 예수의 복음 선포를 듣고서 감동을 받고、그래서 예수의 말씀으로 가득히 채워져 드디어는 그의 사고와 원의까지도 예수의 말씀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될 때에.
주의 기도는 그 어느 누구보다 우선적으로 아무 미련없이 집、가정、직업을 떠나서 매일매일 그분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또한 그분으로부터 복음 선포를 위해 파견되도록 예수를 따랐던 제자들의 삶 전체를 바치면서 하느님의 왕국을「찾던」(루가 12、31) 자들이었다.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고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셨다면 그분은 아울러 기도를 더욱 잘 할 수 있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고 또한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말씀해 주셨을 것이다. 이렇게 예수의 기도학원은 생활학원을 즉 오직 예수로부터 친히 가르침을 받는 자만이 이렇게 기도할 수 있을 것이고 또한 이 기도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그분의 선포에 귀 기울여 그분의 가르침을 그분의 말씀에서부터 이해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예수의 본래 관심사와 최종적인 동기를 알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기도를 묻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의 기도는 그분의 선포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의 기도에서 참으로 배우려 한다면 무엇보다 그분의 중심적인 기도의 가르침、즉 주의 기도에서일 것이다. 주의 기도는「복음 전체를 요약」한 것이라고 테르툴리안(Tertullian)은 말한 바 있다. 주의 기도를 참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예수의 선포를 위한 열쇠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주의 기도가 곧 예수의 선포를 이해하게 하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직 예수의 기도학원에서 귀 기울이는 사람만이 예수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루가복음과 마태오복음「주의 기도」대조
▲루가복음 전승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소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오니
우리 죄를 용서하소서.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마태오복음 전승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소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 잘못을 용서하시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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