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의 대사 논쟁은 자신의 평소 신학 사상을 공적으로 드러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사 자체에 대하여 루터 자신이 처음부터 부정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면、그가 로마에 갔을 때 대사가 허용된 여러 성당과 성인들의 유해가 안치된 경당들을 순례하며 그곳에서 미사를 봉헌하면서 자기 부모가 이미 사망하였기를 바랐다고 한다. 왜냐하면 부모들이 사망하여 연옥에 남아 있다면 루터가 로마에 있는 동안 부모를 위하여 대사를 받을 수 있는 미사와 기도를 바쳐 부모들을 연옥에서 구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1518년 루터의 95개 조항은 독일 전역에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키며 전파되었다. 앞서 보았듯이 처음에는 대사 신학 자체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대사가 상거래 식으로 남용되고 있는 폐단과 교직자들의 도덕적인 타락에 대한 항의였다. 그러나 이제는 루터의 개인적인 유명론적 신학 사상이 구체적으로 수면 위에 떠오르게 되었다. 레오 10세 교황은 대사에 대한 루터의 고발과 대사 시행 현황을 조사하도록 명했고 루터가 로마에 출두하여 자신의 주장을 해명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루터를 옹호하고 있던 삭손의 프리드릭 선 제후의 중재로 로마에 출두하지 않고 독일에서 이 사건이 다루어지도록 배려되었다. 당시 유명한 신학자이며 교황 사절인 가에따노(Toommaso de Vio Gaelano) 추기경은 루터의 여러 저서들을 면밀히 검토한 후、1518년 10월 아욱스부르그에서 루터의 신학적인 오류를 지적하고 철회할 것을 요구 하였다. 그러나 그는 교회의 보고와 대사、믿음과 구원、성사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기를 거부하였다. 루터는 자신이 체포될까 두려워서 아욱스부르그를 비밀리에 탈출하였다. 교회가 아직까지 대사에 대한 교회의 확실한 가르침이 없었다는 루터의 주장을 막고자 1518년 1월 9일에 대사에 대한 교황 칙서가 발표되었다. 한편 10월 16일 루터는 자신의 신학적인 내용이 잘못 전달되어 오해하고 있는 교황에게가 아니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교황에게 상소하겠다고 했고 얼마 후 11월 28일에는 교황보다는 공의회에 상소한다고 하면서 공의회 소집을 요구하였다. 프리드릭 선 제후는 루터를 교회에 인도하거나 추방하라는 가에따노 추기경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막시밀리 아누스 1세 황제의 서거와 그 후계자 문제로 갑자기 국제 정치가 숨 가쁜 긴장상태로 되었다. 교황은 루터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문제의 핵심에 직접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황제 선출에 관계된 후보자들의 역학관계를 이용하여 루터문제를 해결하려고 기다렸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의도는 별 성과없이 빗나가 버렸다.
1519년 라이프찌히(Leipzig) 토론회에서 교회의 정통신학을 옹호하는 요한네스 엑크(Johannes Eck)와 루터와의 논쟁이 전개되었다. 이 논쟁에서도 루터는 자기의 주장을 취소하지 않았으며、이 논쟁을 통하여 교황의 수위권、공의회의 권위、성서 제일주의 등 루터 신학의 본질적인 내용、즉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기본적인 내용이 공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루터는 이 토론회에서 교황과 공의회도 오류를 범할 수 있다며 성서만을 교회의 신학과 개혁의 유일한 원칙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교회는 교황과 공의회가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는 무류성을 무한정으로 주장하지는 않는다. 인간 구원을 위한 신앙과 도덕에 관한 계시진리를 교회의 공식 입장으로 가르치고 선포하는 데 있어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그르칠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제 루터의 투쟁은 교회의 도덕적인 폐해가 아니라 교회 조직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에 관한 것으로 발전되었다.
1520년 루터에 대한 소송 결과가「엑수르제 도미네」(Exurge Domine)가 발표되었다. 이 교서는 루터가 60일 이내로 자유 의지、원죄、성사、은총、죄인의 속죄、고백성사、선행、대사、연옥、교황의 수위권 등에 대한 그의 그릇된 주장들을 취소하도록 요구하였다. 이 교서가 발표된 당시 전후로 루터는 자기의 주장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그 내용을 인쇄하여 4천여 장 이상을 돌렸다. 그는 이 인쇄물을 통하여 성직자와 평신도를 구분하는 교계제도、성서를 해석하는 교회의 독점적인 권위、공의회를 소집하는 교황의 독점적인 권한을 박탈해야 하며 평신도들이 성직자들과 온전히 동등한 권리로 참석하는 공의회를 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루터가 더이상 교회의 정통 교리를 따를 의사가 전혀 없음을 확인하고 1521년 1월 3일 루터와 그의 추종자들을 파문한다는 교서가 발표되었다. 이로써 루터는 공식적으로 교회로부터 이단으로 판결을 받고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시작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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