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신문」이 창간 67돌을 맞이했다고 한다. 사람으로 치면 고희의 나이에 가까운 연륜이다.
그동안 한국 가톨릭 교회는 이 신문과 더불어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역사 현실 안에서 교회 공동체가 겪은 고락이 이 신문에 담겨있다. 그런 만큼 신자들은 이 신문과 정이 들었다.
특히 매사에 중앙집중적인 우리나라 풍토에서, 가톨릭신문은 한 지방교구에서 발행되어왔다. 그러면서 오늘날까지 전국 각 교구를 균형있게 포용하고 있다. 이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한국 가톨릭 공동체 자체의 저력이며 의연함이다.
이제는 지면의 부피도 16면에 이르러 두툼해졌고, 1면에 원색 인쇄가 될 만큼 화려해지기도 했다. 이만한 단계에서 이제「가톨릭신문」은 한 차례 자체 점검을 해볼 만하다고 생각된다. 지나온 길은 어떠했으며 지금에는 어떠하며 또 앞으로는 어떠해야 할 것인가.
연륜이 쌓이면 소박한 대로 지난날에 대한 향수도 있다. 필자로서는 1950년대 말에서부터 생각이 난다. 머리를 깎고 허름하고 헐렁한 군복을 입은 한 신병이 논산훈련소 군인교회 앞 언덕의 게시판 앞에 오래 붙박혀 서 있다. 주일에 개신교 교회로 여겨지는 건물에서 한 번 있는 가톨릭미사를 보고 나오면서 필자는 이 게시판 앞에 서 있다.
거기에는「가톨릭시보」(오늘의 가톨릭신문)이 붙어 있다. 거기에서 필자는 베르나노스의 소설「어느 시골본당 신부의 일기」가 연재되고 있는 것을 읽었다. 초라하고 외롭던 그 시절에 이 소설은 소담하고 영양가가 높은 음식이었다. 지금의 기억으로는 그 번역소설의 삽화도 좋았던 것 같다.
사회에 나온 뒤에 필자는 이 신문에 어설프게 한국 가톨릭 문학에 대한 단편들을 썼고, 때로는 조그만「일요한담」칼럼, 또는 무기명 사설을 썼다. 1970년대 명동성당에서 나라의 민주화를 위한 시국 기도회가 빈번하던 때였다. 성당 앞 언덕길을 올라가고 있던 필자의 귀에 너무도 익숙한 내용의 말이 스피커를 통해 들려왔다.
성당 밖 마당 쪽을 향해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기도회 주최 측인 정의구현 사제단의 어느 사제가 안내 연설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신라 때엔 불교를 위해 이차돈 한 사람이 순교를 했습니다. 조선조 초기에는 정치적 절개를 지키기 위해 사육신 여섯 사람이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한국 가톨릭 교회의 초기 80여년간에는 우리의 선열 가톨릭 신자 1만여 명이 하느님의 진리와 정의를 지키기 위해 순교를 했습니다』
그때 순교복자 성월을 맞이해 필자가「가톨릭신문」사설란에 쓴 글이 스피커를 통해 정열적인 억양으로 울려퍼지고 있었다. 당시는 괴로운 시절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다 즐거운 추억이다.
이제는 새 문민시대가 열렸다고 한다. 세계 판도에도 큰 변화가 왔다. 유물변증법을 믿던 사회주의 세계권이 스스로 와해되었다. 일찍부터 가톨릭 교회는 인간 본성에 어긋나는 사회주의 전제체제는 진정한 해결책이 못 된다고 말해왔다. 성모님이 발현하여 소련이 회개해야 된다는 말씀을 했다고 알려져 있기도 하다.
그러나 지구상의 그 거대했던 세력권이 쉽게 와해되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기적과도 같이 그러한 와해의 현실이 순식간에 일어나고 말았다. 가톨릭의 예언이 맞아떨어진 셈이다.
하느님의 진리와 자연법과 인간 본성에 일치하지 못하는 사회제도는 성공하기 어렵다는 사실이 이 20세기도 끝나가는 단계에서 증명이 되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그리스도교의 종가인 가톨릭 교회의 사명 또한 저절로 증대되어 가고 있다. 이 사명의 수행을 위한 가톨릭 언론의 기능이 요청되고 있다.
언론을 통한 여론의 형성은 교회 안에서도 필요하다. 여론이 있어야 교회 공동체의 사지가 제대로 움직이고 피가 온 몸에 원활이 순환되는 것이다. 보수적인 소심증은 여론의 활성화에 장애가 된다. 신축적이고 다양한 생각들. 다양성 안의 일치, 일치 안의 다양성을 통해 교회의 운영과 신자들의 신앙은 항상 신선해져야 한다.
그 다음에 교회의 언론은 바깥 사회를 교회에 연결하는 단계에까지 나아가야 한다. 하느님의 세상을 위해 교회가 있는 것이지 교회를 위해 세상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교회 언론의 사회적 소통은 하나의 의무이기도 하다.
교회의 신문이나 출판물은 단순한 호교적 기관지 성격을 벗어나야 한다.『한민족의 문학적 고전, 학문과 기술의 연구 결과, 휴식을 위한 읽을거리 등을 제한없이 다루어야 한다』(일치 136).
『가톨릭신문과 출판물은 교회로 하여금 세상을 보게 하는 거울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또한 세상을 향한 빛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일의 떳떳한 수준을 갖추려면 능력있는 사람들을 써야 하고 여기에 필요한 자금도 넉넉히 충당해야 한다. 교회는 문필에 능한 신자들로 더불어 운영하는 효과적인 홍보 사무실의 공간도 설치해야 한다』(일치 139).
이러한 시행 지침은 교황청 매스콤 훈령인「일치와 발전」속에 오래 전부터 이미 명시되어 있다. 이 훈령은 심지어 교회 인쇄물 제작이 사회의 수준보다 더 세련되어야 한다는 데까지 미치고 있다.
우리는 교회의 가르침을 제대로 따라야한다. 그런데 이러한 가르침들이 있는 줄을 제대로 기억이나 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지 모르겠다.
가톨릭신문도 지금의 수준에서 훨씬 더 발전해야 할 것이다. 인쇄 용지의 질이 안 좋으면 큰 부피의 내용이 조잡해 보인다. 종이의 질이 더 좋아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글을 기고하는 필진도 더 다양해야 하고 특히 우리 사회 일류의 필자들을 유치해야 한다. 내부 종사자인 기자들에 대한 대우도 넉넉히 해주어야 한다. 일은 사람이 하는 것인데 교회가 인색하여 인재들을 키우지 못하는 것은 죄가 되는 일이다.
그리하여 늘 그 필자가 그 필자이고, 어딘가 좀 촌스럽고 옹색해 보이는 수준을 벗어나야 한다. 서울대교구에서 또 다른 신문이 나오고 있지만 가톨릭신문은 이미 개척한 전 교구적 공간에서 교구별 격차라든가 벽을 허무는 일에도 활발히 나서야 할 것이다.
교구와 교회를 넘어서 세상을 밝게 비추는 가톨릭신문이 되기를 바란다. 이만한 일 그러한 수준을 성취할 수 있는 역량을 이제 가톨릭신문은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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