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무형문화재 제1호인「정선아리랑」으로 유명한 강원도 정선군 중서부에 위치한 정선읍. 찬바람 치는 3월 주말 저녁에「숨어사는 외톨박이들」을 찾아 정선을 향해 떠났다.
서울에서 고속버스로 4시간여를 달려 밤 11시 30분경에 충북 제천에 도착한 후 다시 4만 원을 주고 정선 가는 총알택시를 탔다. 급커브와 낭떠리지를 피해 시속 1백km를 넘나드는 살인적 속도로 곡예운전을 하며 1시간 반 동안을 달리니 새벽 어둠에 잠들어 있는 강원도 정선읍이 희부옇게 시야로 들어왔다.
◆국내 유일 요양기관
거칠게 달리며 쏟아내는 자동차의 한 점 라이트 불빛을 생명선으로 삼고 어지러울 정도로 많은 고개를 오르내리는 동안 십자가를 진 채 골고타 산을 오르던 2천년 전 예수의 지친 모습을 묵상해 보았다.
강원도 정선은 그 이름처럼 수려한 자연 경관으로 유명하지만 말기 진규폐 환우들 사이엔 여생을 안주할 희망의 땅으로 알려진 곳이다. 바로 이곳에 진규폐 환우들을 위한 국내 유일의 요양기관인「정선병원」이 있기 때문이다.
진규폐 환우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깨끗한 공기 때문에 산골 오지인 정선에 지난 88년 세워진 정선병원은 광산에서 가족의 생계를 위해 한평생 석탄을 캐야만 했던 젊은날의 광부들이 마지막으로 들어오는 막장이다.
2백 명 남짓한 만성 진규폐 환우들로 가득 채워진 병상이 을씨년스러웠지만 죽음을 함께 한다는 강한 유대감이 그들 사이에 흐르고 있음을 교감할 수 있었다. 죽은 후에야 병상을 멀리할 정선병원의 진규폐 환우들은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엇비슷한 처지에 있다.
◆불치의 병 진규폐증
진폐 3급 판정을 받고 90년 4월 이곳에 입원한 강기석(요셉ㆍ77) 할아버지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일제시대 때 강제 노역으로 징용을 대신해야 했던 강기석 할아버지는 해방 후에도 처자식의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강원도 함백탄광에서 막장생활을 해야만 했다.
31살에 시작해 만 55세로 정년 퇴직을 한 1983년까지 근 25년간의 광부 생활만 해온 강 노인은 여느 광부들처럼 달랑 진폐증만을 훈장처럼 몸에 지니고 광산에서 내려와야만 했다. 강 노인은 10년째 산소 호흡기만을 의지한 채 꼼짝 못하고 깡마른 몸으로 병상에서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
치료 방법이 없는 불치의 병 진규폐증. 광석에서 나오는 분진을 계속 흡입함으로써 생기는 이 병은 폐를 돌 같이 굳게해 폐 기능을 격감시켜 결국 죽음으로 내모는 무서운 병이다.
일단 진폐나 규폐증에 걸리면 사지에 힘이 빠지고 폐활량이 줄어들어 숨이 차서 걷지 못할 지경에 이르고 궂은 날이면 기침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심하게 된다. 일단 굳어진 폐는 다른 장기와 마찬가지로 소생시킬 수 없기에 진규폐는 약과 산소 호흡기로 고통을 줄여나가는 방법뿐이라고 전문의들은 전한다.
아침 점심 저녁으로 8알 이상의 약을 꼬박 먹어야 하며 산소 호흡기를 늘 달고 다녀야 고통을 덜 수 있다는 것이다.
◆점차 굳어져가는 폐
또한 이 약들은 시력을 잃을 정도로 독해 장복을 해야만 하는 진규폐 환우들은 위장약 없이는 먹지도 못하는 이중 삼중의 고통을 겪어야만 한다.
그래도 자식을 모두 성장시킨 후 병상에 입원한 강 노인의 처지는 이곳 정선병원에서는 행복한 경우에 속한다. 대부분의 환우들은 심재길씨(요셉ㆍ55)처럼 자신의 병을 알면서도 어린 자식들 때문에 끝까지 광산에 남아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가족 몰래 고통 인내
26살 되던 해인 1968년부터 강원도 강릉 영월 사북 등지에서 광부 노릇을 해온 심재길씨는 75년 진폐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막막한 생계와 자식 교육 때문에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1980년까지 5년간을 더 일해왔다.
그러나 턱에 차오는 고통으로 더 이상 막장 생활을 견뎌낼 수 없었던 심씨는 80년 자진 퇴사하고 부산에서 13년간을 이 공장 저 공장을 전전하며 막일을 했다. 심씨가 13년간 옮긴 직장만 해도 햇수와 비례한 13번이다. 광산에서 얻은 진폐가 매년 행하는 정기검진 때마다 그를 회사에서 몰아냈기 때문이다. 광부를 진찰한 경험이 적은 부산의 의사들은 심씨의 폐를 보고「결핵」으로 소견을 밝히는 경우가 부지기수였고 심씨가 이를 해명하면 회사에서는 진폐에서 오는 합병증을 염려, 회사에 불이익이 닥칠까봐 서둘러 그를 쫓아냈다.
심씨는 그래서 정기 검진이 금방 끝난 공장만을 골라 취직한 후 다음해 정기검진때까지 꼬박 1년을 채우고 또 다른 직장을 찾아야만 했다. 이렇게 심씨는 자녀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진폐증을 앓으면서도 광산에서 5년, 부산 공장에서 13년 등 18년간을 제대로 병원 한 번 다니지 못하고 자신의 몸을 희생시켜야만 했다.
심씨는 또『이는 자신만이 겪는 특별한 역경이 아니라 광부라면 한 번쯤 겪어야 하는 희생』이라고 말했다.
진규폐 환우들이 그들의 안식처인 정선병원에 입원했다 해서 꼭 행복하고 고생이 끝난 것은 아니다. 진규폐증은 다른 병과는 달리 직업병으로서 전염성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폐병」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들과 접촉하기를 꺼려하기 때문이다. 정선읍 주민들도 예외가 아니다.
그 때문인지 병원 밖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꿋꿋이 살던 많은 환우들이 이곳에서 자포자기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따가운 냉대의 눈길
이러한 사정을 전해 들은 정선본당 김영진 주임신부와 신자들은 92년부터 진규폐 환자들이 삶의 희망을 포기하지 않도록 용기를 북돋아주는 일에 최선을 다해왔다.
『가족을 위해 죽음을 알면서도 자신의 몸을 불치의 병에 내던진 훌륭한 가장들을 그냥 내벼려 둘 수가 없었다』는게 한 봉사자 수녀의 말이다.
수녀들은 암울한 죽음만을 기다리는 환우들을 일일이 방문해 성서를 읽어주고 하루 종일 그들의 넋두리를 들어주는 게 일이다. 그리고 수녀들은 결코 자포자기 하지 말고 예수를 닮은 삶을 끝까지 살아가도록 용기를 심어주는 것을 잊지 않는다.
레지오 단원들도 이들의 말벗이 되어주기 위해 매주 빠지지 않고 꼭 방문한다. 김영진 신부는 방문객이 아닌 벗으로 이들을 찾아가도록 레지오 단원들에게 매번 주의를 주고 당부를 한단다. 이러한 정선본당 신자들의 노력으로 요즘 많은 환우들이 처음 병원에 들어올 때처럼 활기를 되찾고 있고 신앙을 갖기를 희망하는 환우들이 늘고 있었다.
◆희망 잃고 자포자기
김영진 신부는 이들 진규폐 환우들이 조금이라도 더 삶의 희열을 갖도록 하기 위해 서울 압구정 본당 독서 포럼회와 성바오로 수도원에 도움을 청해 지난해 8월 병원 내에「도서 시청각실」을 개설하기도 했다.
독한 약으로 대부분 시력을 잃어 오랫동안 책을 읽지 못해 주로 교회에서 제작한 비디오물과 성음악 테이프를 보고 들은 많은 환우들이 도서 시청각실에서 마음의 안정을 누린다고 한다.
『예전엔 병든 자신을 원망도 하면서 마음을 안정시키지 못해 병원 당국에 불평 불만을 터뜨리곤 했는데 정선본당 신자들을 만나면서부터 매사를 기쁘게 받아들이고 묵주기도도 열심히 하고 있다』는 강기석 할아버지는『소외 받은 자들의 고통을 나누고 이해할 줄 아는 정선본당 신자들이 있는 한 모든 것을 주님께 봉헌할 수 있을 것 같다』며 만족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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