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 사도가 순교하였던 곳은 바티칸 언덕과 쟈니꼴로 언덕 사이에 있었던 네로 황제 경기장으로, 그 북쪽에 있는 바티칸 언덕은 로마인들이 네크로폴리스(Necro-polis, 죽은 자들의 도시)라고 부르는 공동묘지였다. 베드로 사도가 순교한 이후 신자들이 군인들의 눈을 피해 이곳에 사도의 시신을 눈에 뜨이지 않게 초라하게 안장하였다.
313년 밀라노에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리치니우스와 합의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는 조치를 발표한 이후, 드디어 지하교회가 지상에서 자유롭게 복음을 선포하게 되었다. 그리고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기존의 묘지에 기초공사를 하고 베드로 사도의 무덤 위에 거대한 대성전을 지어 326년경에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그 후 여러 차례 보수하고 개축하였지만 교황의 아비뇽 유폐 시절 동안 관리 소홀로 대성당의 한 부분이 허물어질 지경이었다. 그래서 1507년부터 율리우스 2세 교황(Julius, 1503~1513)은 베드로 대성전을 재신축하는 계획을 세웠었다. 더구나 성년을 선포하고 전 세계의 신자들이 베드로 대성전에 순례하러 오는데 그 당시 상태로서는 순례객들을 맞이하기가 불가능하였다.
1514년부터 레오 10세 교황(Leo, 1513~1521)이 대성전 신축공사를 계속하면서 이를 돕기 위해 헌금한 자들에게 기도와 고백성사를 전제조건으로 성년대사를 허용하였다. 이미 지난주에 소개된 대로 교회 건축이나 병원, 고아원 등을 돕기 위한 헌금이 대사와 연결된 경우가 이전에 종종 있었다.
그러나 독일에서 일어난 대사논쟁은 좀 더 복잡한 양상을 보였다. 막데부르그(Magdebur)의 알브레흐트(Albrecht)는 마인쯔(Mainz) 교구장까지 겸직하려고 교황청과 교섭하였다. 마인쯔 대주교는 황제 선출권이 있는 선제후(選帝候) 직까지 겸하므로 세속적으로 명예롭고 실권 있는 주교직이었다.
이미 앞서 언급한 대로 제후직을 겸한 대부분의 주교들은 사목자로서의 사명보다는 제후직이나 세속적인 지위에 더 비중을 두고 있던 자들이었다. 그는 마인쯔 교구장직을 맡기 위해 로마에 2만9천 두까띠(Ducati)를 선납해야 했는데,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큰 은행 중의 하나인 독일의 푸게(Fugger)은행이 대납했다. 그로 인해 그는 자기가 맡은 교구에서 대사 설교의 권한을 받았는데, 모금된 금액의 절반은 푸게은행의 빚을 갚는 데 보내고, 절반은 베드로 대성전 건립 기금으로 보냈다.
그는 대사 설교가로 도미니꼬 수도회의 요한네스 텟첼(Johannes Tetzel) 수사를 임명하면서, 대사 설교에 참고할 개요적인 지침서(lnstru-ctio Summaria)를 주었다. 대사신학 자체로 보아 그 핵심 내용에는 큰 오류는 없었으나 대사를 지나치게 상품화하여 잘못 설교한 것은 사실이다. 헌금한 자들에게 고백표를 주었는데, 이 표를 지참하는 자들은 어느 신부에게나 고해성사를 보면 교황이 보류한 죄까지 용서 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면죄부」라는 표현처럼 고해성사도 보지 않고 죄가 사해진다고 가르치지는 않았다. 하여간 이 수사는 대사에 대한 올바른 교리의 한계를 넘어 과장되게 설명하였다. 그가 설교할 때, "동전이 헌금통에 떨어지는 소리가 나자마자 영혼은 연옥에서 해방된다"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 말은 1482년 프랑스 소르본느(Sorbo-nne)에서 광고로 붙여진 표어였다.
루터는 텟첼의 대사 설교를 직접적으로 들어본 적이 없었다. 당시 비텐베르그의 제후는 자기 영토 내에서 대사 설교를 금지시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사 설교에 대한 소문을 들은 그곳 신자들이 인근 지방으로 가서 헌금하고 고백표를 받아왔을 뿐이다. 루터는 이들의 고백을 들으면서 대사 설교의 내용이 그리스도인들의 참회정신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였다.
기도와 극기와 참회로써가 아니라 돈으로 거룩한 것을 사려고 하는 위험한 생각에 분개하였다. 그래서 과장된 설교와 대사에 대한 교리에 대하여 반발하여 1517년 모든 성인의 축일 전날에 브란덴부르그의 알브레흐트 주교와 자기 주교에게 대사 설교의 남용을 막아 달라는 강한 어조의 항의 서한을 보냈다.
루터가, 95개 조문을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그의 본당 정문에 붙여 공개적으로 항의했다는 사실 여부는 아직 많은 논란을 벌이고 있으나 루터의 진술과 그가 보낸 서한의 날짜를 대조하면서 많은 사가들은 부정하고 있다.
알브레흐트 주교가 루터의 항의 서한에 침묵으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동안 그는 몇몇 신학자들에게 자기 의견이 담긴 내용을 보여 주었는데,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그 내용들이 독일 전역에 삽시간에 전파되었다.
대사는 교회에서 부과한 교회법적인 벌의 용서일 뿐이며 죽은 자들에게 적용할 수도 없고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결과라는「교회의 보고」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대사의 남용에 대한 루터의 항의 내용 자체는 틀린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논쟁이 진행되면서, 루터는 대사신학 자체를 부정하는 자기의 신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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