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외치신 절규는 우리도 우리 생애에서 자주 반복하는 아픔의 표현입니다. 어려운 시련이 부딪칠 때마다, 눈물과 슬픔이 엄습해 올 때마다 그리고 캄캄한 절망이 우리를 뒤덮을 때마다 우리는 하느님을 원망하고 세상을 미워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 때문에 빛나는 새벽을 만나게 됩니다.
사형수를 매다는 십자가의 형틀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잘 모릅니다. 기록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시기 수백년 전부터 중동 여러 나라에서 사용되어 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형의 절차는 이렇습니다. 먼저 죄인을 심하게 고문해서 초죽음을 만듭니다. 피가 나올 때까지 때려서 미리 반쯤 죽여놓는데 그래야 십자가 위에서 덜 고통 받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놀리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리곤 사형수를 사형장으로 끌고 갑니다. 앞에는 죄의 내용을 적은 패를 든 자가 서고 뒤에는 십자가를 짊어진 죄인이 따르는데 그 옆에는 무장한 군인들이 지키면서 따라갑니다. 형장에 도착하면 죄인을 십자가에 누이고 좌우 손에 못 박고 두 다리는 헐겁게 묶습니다(예수님께는 못을 박았습니다). 그리고 양 허벅지 사이에는 나무를 끼워서 매달릴 때 몸무게를 지탱케 해줍니다. 그래서 미리 준비한 말뚝에 십자가를 세우면 죄인은 매달린 채 주리고 목말라 미쳐서 죽습니다. 어떤 이는 일주일 이상 산다고도 하나 예수님은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참으로 무력했습니다. 당신이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 위에서 내려와 보라고 사람들이 조롱을 했지만 주님은 내려오지 않으셨습니다.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까지도 십자가에서 내려온다면 예수를 믿겠다고 했지만 그래도 그분은 내려오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행적으로 보아 그가 구름을 타고 천상의 군대를 이끌고 오실 줄 알았으나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래서 실망했으며 예수님이 힘없이 일찍 죽자 제자들까지도 도망쳤습니다. 도대체 자기들이 믿고 따랐던 주님이 나무에 매달렸다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요 부끄러운 일이었을 뿐입니다.
성서(신명 21, 23)에 보면 나무에 달린 시체는 하느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규정했기 때문에 이 참혹한 광경 앞에 사람들은 넋을 잃었습니다. 아버지 하느님도 침묵만 지키셨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십자가에 매달리도록 그냥 두셨으며 처참한 고통과 죽음 속에서 신음하는 아들을 그저 지켜보고만 계셨습니다. 하느님의 능력과 힘도 세상 앞에 너무도 무기력하게만 보였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예수를 죽음에서 건져주지 못했습니다. 안타까운 십자가의 길에서 그를 빼내지 못했습니다. 모든 것은 거기서 허망하게 끝장이 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바로 이와 같은 허무와 절망 속에서 나타났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나 밤이 걷히고 있을 때 주님은 이미 부활하시어 무덤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헐레벌떡 달려왔을 때는 이미 빈 무덤이었으며 그리고 그들 생애에 결코 잊지 못할 새벽은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처럼 자신의 몸을 온전히 십자가에 매달았을 때에 주어졌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묵상해 보면 인간의 고뇌도 마찬가집니다. 고통받는 아픔 속에는 절망밖에 없으나 우리의 고통을 십자가에 매달 때에 부활의 아침은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처럼 짊어져야지 그것을 피해서 도망간다면 인생은 굉장히 고달프게 됩니다. 예를 들어 가난한 사람은 가난을 짊어지고 가야 합니다. 안 짊어지겠다고 하면 도둑이나 강도가 됩니다. 불구자는 불구의 병을 짊어져야 합니다. 짊어지면 생각보단 훨씬 가볍고 그리고 그 위에서 빛나는 은혜가 주어집니다. 만일에 그것을 계속 거부하여 불평만 한다면 그는 병이 아니라 자신의 못난 판단 때문에 평생 징징거리며 불행하게 됩니다.
세상은 묘합니다. 내가 내 십자가를 저주하면 십자가도 나를 저주하고 세상도 나를 저주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그러나 내가 내 십자가를 은혜로 바라보면 십자가도 나를 은혜로 바라보고 세상도 나를 은혜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그리고 실상 참된 축복은 십자가의 아픔을 통하지 않고는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바늘과 실처럼 십자가의 아픔과 부활의 기쁨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백인대장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는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하면서 주님의 참 모습을 바라봤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의 아름답고 인간적인 위대한 모습은 바로 그리스도처럼 십자가에 온전히 매달리는 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제 부활이 한 주일 남았습니다. 부활의 새벽은 벌써 우리 안에서 밝아져오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우리의 십자가를 용기 있게 지고 믿음으로 매달리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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