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뭣하러 도회지에 가서 징역살이를 해유. 공기 좋고 인심 좋은 고향땅을 내버리고, 서울 가서 그 고생을 어떻게 해유"
충청남도 서산군 운산면 용장2구 미륵벌이란 마을에 살고 있는 노부부 김동교(야고보ㆍ73세) 할아버지와 유진순(마리아ㆍ67세) 할머니가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다.
슬하에 3남 3녀를 키워 지금은 전부 도회지로 나가 살고 있고, 시골에 노부부가 홀로 남아 논밭을 일구며 사는 전형적인 농촌가정의 모습이다. 이 마을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농촌에서는 이처럼 노부부들만이 살거나, 홀로 사는 노인들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허리가 휘도록 자식들을 위해 땅을 일궈 수확을 해야 했던 이들은 다시 자식들로부터 소외된(?) 상태로 허리 펼 날 없이 별 소득도 없는 농사일을 하고 있다.
"서울 사람들은 농민들이 이렇게 다듬어 줘야 먹습니까?"
기자가 막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달래를 다듬던 한 아낙이 불평 반 농담 반으로 던지는 한마디다. 이 말에 농약을 치지 않고 비닐하우스에서 길러낸 달래를 보기 좋게 손질하고 있던 아낙들이 저마다 불평불만을 털어놓았다.
그 말들 속에는 서울을 포함한 도시인들에 대한 강한 불신과 정부에 대한 불만이 뚝뚝 묻어 나왔다.
◆죽은 듯 적막감만 가득
우루과이 라운드로 인해 올 겨울 이 마을은 죽은 듯 조용하다. 예년 같으면 가을 추수의 기쁨으로 이집 저집에 삼삼오오 모여 막걸리를 마셔가며 매년 농사일에 대한 이야기꽃을 피우는 장정들의 모습을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었는데 올해는 저마다 침통한 표정이다.
김동교 할아버지는 "우리 장남도 집안일뿐 아니라 이 동네의 소문난 일꾼이었는데 몇 년 전 농사 짓는 일에 실망했는지 대처(도시)로 나가 살고 있다"고 설명하면서 "올해는 특히 젊은이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도시로 나갈 궁리를 하는 것 같아 걱정된다"며 쓸쓸한 표정을 짓는다.
고향에 내려와 농사일을 돕고 있던 막내아들 김근묵(요셉ㆍ24세)씨는 "일반적으로 아가씨들은 농사꾼보다는 막노동을 해도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을 선호한다"고 전제하고 "형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슬픔을 느끼곤 했었다"며 "안산에서 공장을 다니다가 지금은 집에 내려와 있으나 머지않아 다시 도시로 갈 것"이라고 토로했다.
김씨의 어머니 유진순 할머니는 "이번 명절 때 자식들이 손자 손녀를 데리고 고향을 찾아와 모처럼 사람 사는 기분을 맛보았으나 휴가가 끝나고 돌아가자 겁나게 서글퍼 영감과 함께 밤 새워 울었다"고 말하며 멀리 있는 자식들이 생각나는지 눈물을 훔쳤다.
◆저마다 상경 궁리 몰두
농자천하지대본야란 말이 무색해진 지 벌써 오래다. 경제 발전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희생되어야 했던 농촌의 가정은 삭막하기 그지없다. 온 동네를 통틀어도 젊은 사람이나 아이들을 찾기가 가물에 콩 나도록 어려운 현실이 오늘날 우리 농촌의 현실이고 보면, 앞으로 우루과이 라운드로 인해 이런 현실이 나아지기보다는 더욱 어려운 처지에 몰릴 것은 뻔하다.
◆보람 없이 빚만 더 늘어
농촌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장가를 못가는 현실, 땡볕에서 땀을 흘린 보람도 없이 빚만 늘어나는 농촌의 현실에서 올바른 가정을 일구기란 매우 어렵다.
김근묵씨는 이에 대해 "신토불이란 말이 언론을 통해 유행어처럼 번지고 있지만 막상 농촌의 현실은 나아지기보다 더 악화되는 현실에서 누가 농촌을 지키겠느냐"고 반문하고 "농촌이 망하면 우리나라 전체가 망한다는 기초적인 진리를 외면한 체 미국 캘리포니아 쌀 등 수입 농산물을 소비하고 있는 일부 도시인들을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다"며 농촌 가정을 지키기 위한 국민들의 의식 전환을 촉구했다.
"막내로 태어나 땅과 고향을 버리고 도시로 간 형과 누이들을 생각하면 이곳에서 노부모님을 모시고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나 현실이 그렇지 못해 부모님께 죄송스럽다"고 토로하는 김씨는 또 "땅과 함께 일평생을 사는 농민들은 저마다 땅의 마음을 갖고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으나 농촌이 죽어야 하는 구조적인 정부 정책으로 인해 이곳 사람들은 이제 아무도, 어떤 정책도 믿기를 거부하고 있다"고 말해 오늘날 농촌의 현실을 실감케 했다.
주민들 역시 "물질적인 것보다 정신적으로 도시 사람들이 농촌을 도와주었으면 한다"고 당부하면서 "시골 사람들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 우리나라에서 누가 농업에 목숨을 걸겠느냐"며 "가톨릭 교회가 실시하고 있는 도ㆍ농 직거래 등 도시와 농촌을 잇는 노력들을 범국민적으로 전개하지 않는 한 농촌의 현실은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일손이 부족해 논바닥에서 죽어가는 벼, 나무에서 그대로 죽어가는 사과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농촌의 피폐된 현실 속에서 그들이 희망을 갖고 우리의 고향(?)을 지키게 하기 위해 정부는 최근 농촌 지원금을 따로 마련하는 등 뒤늦은 대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사람 대접 못 받는 농부
91년도 한국 농촌경제 연구원이 실시한 일반 농민의 의식 조사를 보면 20대 농민 중 농사를 짓겠다는 대답은 전무하고 90% 이상이 다른 일을 하겠다고 대답했으며 농어민 후계자 설문조사에서는 한국 농업의 장래를 낙관적으로 본 이가 19ㆍ5%에 불과하고 45%가 기회가 오면 농촌을 떠나겠다고 대답한 것처럼 오늘날 농촌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고향의 맛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어져 있음을 알게 한다.
항상 명절 때면 저마다 고향을 찾는 우리 민족의 귀향 본능에는 농촌에 대한 따스한 추억들을 갖고 있다. 주름 잡힌 부모의 웃는 얼굴처럼 포근하게 감싸주는 고향 산천을 그리며 어릴 적 추억에 잠기곤 하는 현대인들에게 농촌이 이젠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산업사회로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도 고향의 부모님이 작고하고 나면 농촌은 기억 속에서조차 잊혀져 간다. 김동교 할아버지 부부는 "죽어도 도시에서 살고픈 마음이 없지만 우리 둘 중 한 명이 먼저 저 세상으로 가면 어쩔 수 없이 도시로 나간 자식들을 찾아가 징역살이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답답해진다"고 말하면서 "제발 젊은 사람들이 다시 농촌을 찾도록 높은 분들이 선처를 해주길 부탁한다"고 피력했다.
◆노인과 아낙네만 남아
이들 부부들도 다른 가정과 마찬가지로 땅을 갈아줄 사람이 없어 일하고 싶어도 농사를 짓지 못하는 실정이다. 마을의 남자들은 가까운 읍이나 면으로 날품팔이를 나가면 농사일은 힘없는 아낙네들의 몫이 된다.
그래서 가난한 농촌에 살면서 자녀들을 도시로 도시로 보내려 애쓰게 되고, 어쩔 수 없이 자식들에게 농업을 물려주는 부모는 스스로 애통해하게 되는 게 일반적인 농촌가정의 현실이다.
사람이 살지 않아 쓰러져가는 빈 집들은 마을 전체를 죽음으로 떨어지게 하려는 듯 음산한 분위기를 풍겨내고, 노인과 아낙네들만이 남은 농촌은 더 이상 생명을 생산하는 못자리가 아니라 죽음과 가까운 마을이 되고 있다.
우루과이 라운드의 파고에 어깨를 움츠린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94 세계 가정의 해」를 맞아 풋풋한 인정과 웃음이 실종된 농촌가정을 살리기 위해 국민적 단합이 필요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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